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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 전엔 왜 책상부터 치울까?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2-12-11 10:00:00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심리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혜리 분)은 시험 공부를 시작하기 전 컴퍼스와 자를 동원해 공부 계획표를 짜고, 물걸레질을 해가며 독서실 책상을 정성껏 치운다. 필통의 필기구도 ‘칼각’에 맞춰 정리한다. 하지만 덕선은 공부 시작 몇 분 만에 독서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잠이 들고 만다. 책상 정리만 하고 공부를 못한 건 비단 이날 뿐만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공부를 미룬 탓에 결국 덕선은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게 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공부하기 전 책상 정리를 끝내자마자 잠들고 만 덕선. tvN 화면 캡처 

우리는 누구나 해야 할 일들을 조금씩 미루며 산다. 집안일 같은 사소한 것부터 공부, 일, 운동, 모임 등 다양한 것을 미루곤 한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기사 검색을 한참 하거나, 헬스클럽 등록 전에 운동복만 사서 모셔두거나, 미루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미루는 습관을 고치는 자기계발서만 자꾸 사다 모으는 등 다양하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꼭 해야 하는 일을 미루고 딴 짓을 하는 것을 지연행동(procrastination)이라 부른다. 

미루는 습관은 누구나 갖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만성적이고, 이런 습관 때문에 기회를 잃거나 금전적 손해를 보고, 스스로를 ‘쓸모 없다’고 생각해 고통스럽다면 문제가 된다. 우울증, 불안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등도 미루는 습관 때문에 일상에 장애가 생기는데, 이런 병리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살펴보기로 한다. 
왜 꾸물거릴까?
보통 게으르거나 의지가 부족해 일을 미룬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연행동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감정적 문제와 연결돼 있다고 입을 모은다. 지연행동 연구 전문가인 티모시 피칠 캐나다 오타와 칼튼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꾸물거림은 부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 인간의 대처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할 일 앞에서 우리는 압박, 불안, 스트레스 등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데, 딴 짓을 통해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다. 과제발생 → 부담·압박·불안 → 회피행동(딴 짓) → 안정감지연행동의 원리는 위와 같다. 이때 선택하는 ‘딴 짓’은 원래해야 하는 일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일은 미래로 미루고, 당장의 흥미를 선택하는 쾌락 원리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때가 되면 하겠다‘고 기약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완벽한 때란 웬만해선 잘 오지 않는다.
일을 미루는 이유는 각자 다르다
20년간 지연행동을 연구해 온 조셉 페라리 미국 시카고 드폴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루는 습관을 가진 이들의 특징을 ‘회피형’과 ‘각성형’으로 나눴다. 각성형은 앞서 설명한 쾌락 원리에 의해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계획적으로 게으름을 부리면서 마감 시간 일보 직전에 밀려오는 흥분과 긴장감으로 능률이 바짝 오르길 기대한다. 

미루는 습관 뒤에는 완벽주의, 낮은 자존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회피형의 미루는 습관 뒤에는 좀 더 복잡한 기제들이 숨어 있다. 낮은 자존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불안 등이다. 특히 능력에 대한 평가에 굉장히 민감하다. 페라리 교수는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보다는 일을 미뤄 ‘노력이나 시간이 부족해 실패했다’고 평가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이들은 스스로를 압박하고, 실수하면 질책하고, 결과가 나오더라도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일을 미루며 도피하다 벼락치기를 한다. 열심히 했지만 자신의 높은 기준에 못 미쳐 패배감을 경험하는 것보다 미루다가 시간에 쫓겨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며 일을 미루기 쉽다. 예를 들어 ‘나는 승진할 자신(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승진 시험도 보지 않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승진 심사에서 떨어지는 실패를 맛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미룬다고 진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루기를 통해 당장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피칠 교수는 “하기 싫은 일을 회피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믿지만 사실 이는 자기 자신을 잘못된 길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시험을 착실히 준비한 학생과 벼락치기로 밤을 샌 학생이 받은 스트레스의 총량은 같지 않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벼락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감기, 독감, 소화불량, 불면증,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 확률이 일반인 보다 높았다. 격렬한 스트레스 반응이 신체 증상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또 미루는 습관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는 미룬 일을 대신 해줘야 하고, 직장과 학교에서 대인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부, 일 등 하기 싫은 것들을 미루면 당장은 안정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벼락치기’나 밤샘을 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더 크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왜 하기 싫은가?’ 자기 이해 필요
페라리 교수는 “미루는 사람한테 ‘일단 해’라고 말하는 것은 만성 우울증 환자에게 ‘기운 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기 싫은 일을 강제로 시키기보다 근본적 원인인 감정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제를 미루는 진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기 이해가 먼저다. 만약 시험 공부를 계속 미룬다면 성적이 나왔을 때 주변의 평가가 두려운 것인지, 자신감이 없어서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헬스클럽 등록을 미루는 경우라면 체중 감량 목표가 너무 높아서 부담스러운지, 가더라도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몰라 막막한지 등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여러 시도를 해보면서 습관을 고쳐나갈 수 있다. 
미루는 습관을 대체할 습관 기르기
자기 이해 과정이 끝났다면 이제는 정말 행동할 때다. “내가 마음을 굳게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은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 완벽주의, 지연행동 등을 연구해온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들은 언제나 마음이 안 먹어지는 게 문제”라며 “우선 아주 작은 행동을 시작하고 그 뒤에 동기를 유발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루던 일을 하려면 일종의 워밍업이 필요하다. 비교적 시도해보기 쉬운 일을 택해 5분, 10분, 15분 만이라도 집중해서 시작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쉬워진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 교수는 15분 기법을 추천했다. 이 교수는 “처음부터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15분 동안 큰 소리로 책을 읽어보자. 그러면 집중력이 생기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꼭 15분이 아니어도 괜찮다. 5~15분 사이 본인에게 맞는 시간을 찾으면 된다. 

이밖에 마감 기한을 이틀 정도 당겨 자신만의 데드라인 만들기, 눈에 보이는 곳마다 해야 할 일을 적은 메모 붙여 놓기 같은 것도 도움이 된다. 주변에서는 “마감이 얼마 안 남았어”라며 불안을 조장하는 말보단 “초안은 언제 나오니”처럼 시작을 독려하는 의사소통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미루는 습관을 고치는 행동 리스트

·하루의 할 일 목록(최대 3개) 적고 기한 정하기
·목록에서 시급한 순서부터 처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할 일의 단위를 가능한 작고 구체적으로 쪼개 ‘만만하게’ 만들기
·5~15분 타이머 맞추고 일단 시도해보기 
·하루 중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 파악하기
·알람 맞춰놓고 휴식시간 갖기
·완료한 일 목록 만들기
·시간 관리에 도움을 줄 동료 구하기
·원래 마감보다 이틀 당긴 자신만의 마감 기한 만들기
·눈에 보이는 곳 마다 할일 적은 메모 붙여 놓기

헤이든 핀치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 등 참조할 일 목록 작성도 도움을 준다. 하루 최대 3개까지만 정해 시급한 순서대로 적고, 기한을 정한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맨 위에 배치한다. 쇼핑하기 등 당장 하고 싶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은 맨 마지막 줄에 두고 다른 일을 다 처리한 다음에 한다. 일종의 보상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완료한 일 목록을 만들어 성과를 되짚어보면 자기 효능감을 높일 수 있다. 

부담이 큰 일일수록 계획 단위를 잘게 쪼개는 것이 좋다. 집 청소를 방 청소로, 방 청소를 침대 정리로, 침대 정리를 이불 털기로 쪼개 최대한 부담 없는 수준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불 털기에서 끝나도 괜찮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 사소한 한 가지라도 실행한 것이 의미있다고 여기는 태도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의 저자 헤이든 핀치는 “일단 몸을 움직여 시작하면 성공은 따라온다”며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계발서를 읽는 등) 지금껏 쏟아 부은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 역시 “한 번에 하나씩, 지금 해야 한다. ‘왜 못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어떻게 하는가’를 신경 쓸 차례”라며 “혼자서 어렵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해 극복해가야 한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