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2010 남아공 월드컵 감독
허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인 일본 축구는 우연이 아닌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 이뤄낸 결과물”이라며 “늘 일본에 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우리도 하루빨리 축구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진구 기자
《12년 만에 월드컵 방문 16강 진출을 이뤄낸 카타르 월드컵. 비록 8강 진출은 못 했지만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무대이기도 하다. 12년 전 첫 방문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뤄냈던 허정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현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은 “이번 월드컵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일본 축구의 발전상”이라며 “우리도 일본처럼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유망주를 발굴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16강이 쉽지 않다는 전망도 많았는데, 당신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했더라.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이 강팀이다 보니 인색한 평가가 많았는데, 나는 오히려 찬스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손흥민 황희찬 김민재 등 선수 구성이 역대 월드컵 중 가장 좋았다. 더군다나 다른 때와 달리 11월에 열리다 보니 유럽에서 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시즌 중에 참가해 팀 훈련을 충분하게 하지 못했다. 우루과이가 강팀이라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와 붙었을 때보다 전력이 훨씬 약해졌다. 그때 뛴 수아레스가 이번에도 뛰지 않았나. 세대교체가 안 된 거지. 포르투갈은 2002년에 우리가 이겨도 봤고, 또 마지막 경기라 워낙 변수가 많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우리가 독일을 이긴 것도 마지막 경기였다. 그래서 나는 16강이 아니라 오히려 8강을 노려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볼을 돌리면서 전진하는 게 빌드업이 아니다. 목적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볼을 돌리는 과정이라면 빌드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상대의 뒤쪽 공간이나 급소를 노리기 위한 과정이어야 하는데, 이게 쉽게 쌓아지는 능력이 아니다. 또 상대가 우리 빌드업을 깨려고 전방 압박을 할 때 그걸 다시 깨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사실 빌드업 축구는 꽤 오래된 세계 축구의 흐름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이 흐름을 파악하는 데 좀 약했다. 꼭 한발 늦게 따라가고…. 그러다 보니 한때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우리가 1986년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에 10회 연속 진출했는데 개구리라니….
“내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선수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트레이너와 코치로 참가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축구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 늘 아시아권에서만 뛰었으니까.” (그 뒤라도 도입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당신은 네덜란드에서 뛰다 왔는데.) “그런 축구가 누구 하나가 말 한 번 한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훈련하고, 극한 상황을 이겨내면서 조금씩 쌓이는 거다. 축구는 말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니까.”
※김정남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참고할 만한 게 없어 막막하고 두려웠다. 마라도나 한 명만 알고 아르헨티나전에 나섰다”고 말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이회택 감독은 “일주일이면 시차 적응이 다 끝날 줄 알았다. 잔디 등 그라운드 컨디션은 신경도 못 썼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이강인이 몸이 참 좋은 상태였는데 왜 처음부터 기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긴 하더라. 그리고 물론 감독이 제일 잘 알 테고, 또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게 다르긴 하겠지만, 지더라도 과연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대비를 제대로 못 한 건 아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물론 브라질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 최고의 강팀이다. 그런데 6월에 우리가 브라질과 평가전을 하지 않았나.”
―당시 1-5로 졌는데….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평가전 때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하고 대비해, 질 때 지더라도 악착같이 상대를 힘들게 만들었어야 했다. 상대의 기술이 워낙 좋기 때문에 밀착 방어와 함께 옆에서 도와주고 막아주는 협력 수비도 치열하게 했어야 했는데, 수비에서 그런 면이 잘 안 보였다. 6월 평가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정말 제대로 보완했는지…. 이런 부분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전반에만 4골을 넣으니까 후반전에는 다음 경기 대비하느라 살살 하지 않았나. 제대로 뛰었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뻐하는 허정무 감독.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일본은 고등학교 팀만 수천 개다. 우리와 비교가 안 된다. 그리고 일반 국민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성인 대표팀은 그럭저럭 버티지만 중고등학교 한일전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의 다 지고 있다. 일본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축구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있다. 유망주 육성은 물론이고, 이제는 유럽에 상설 캠프장까지 만든다고 한다. 전지훈련은 물론이고 유럽에서 뛰는 자국 선수들도 이용하고, 또 일본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도 활용할 계획이라는 거다.” (우리는?) “없지….”
※지난해 전일본고등축구연맹에 등록된 고교 팀은 3962개다. 대한축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 고등부(U18) 등록 팀은 190개다.
―일본이 오래전부터 대표팀의 성적 부침이 적다고 하던데, 그런 까닭인가.
“앞서 말했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부족한 면을 채우고, 낮은 부분을 끌어올리다 보니 우수한 선수가 끊임없이 배출돼 전력이 굉장히 안정돼 있다. 기본기나 기술은 지금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다. 근성도 많이 올라갔는데, 이번 월드컵 독일, 스페인전에서 후반에 뒤집기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몸싸움 때 전혀 물러서지 않더라.”
―일본 축구가 한국보다 앞서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뿐이라던데 맞나.
“그런 면이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일본이 잘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감정적으로만 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도 일본에 지는 건 싫다. 하지만 계속 지고 싶지 않다면, 인정할 건 인정하고 이기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
※전 축구 국가대표 이영표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가 일본보다 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일본이 더 강하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한 때가 이미 2013년이다.
―우리가 평가전이나 친선경기조차 너무 예민하다 보니 긴 호흡으로 준비하는 게 힘들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게 참 어려운 게… 물론 평가전이 새로운 전술을 시험하고 이런저런 선수도 기용해 보는, 감독의 구상을 적용해 보는 자리인 건 맞다. 그렇긴 한데 팬들은 워낙 기대가 크다 보니 또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승패도 중요한 거지. 더군다나 한일전이면 더…. 그러니 감독 입장에서는 평가전이지만 승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도 일부 그런 게 있었지만 과도한 악플은 이제는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하도 충격을 받아 지금까지도 댓글을 못 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유럽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 공항에서 선수들을 다 풀어줬다. 대표팀이 대부분 대학 선수들이었는데, 바로 대학선수권대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가 끝나고 평가전을 위해 소집했는데 다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한여름에 4차례 경기가 포함된 전지훈련을 다녀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바로 대회를 뛰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평가전을 하는데 20분 정도 지나니까 녹초가 돼 뛰지 못하고 걸었다. 결국 1-4로 박살났다.”
―경기란 게 질 때도 있지 않나. 상대가?
“일본…. 누리꾼들이 댓글로 융단폭격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심장을 후벼 팠다.” (뭐라고 썼기에.) “그때 부친이 유럽 전지훈련 중에 돌아가셔서 급히 귀국해 장례를 치렀는데, 그 돌아가신 아버지를 걸고넘어졌다. 그 글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후로는 지금까지 인터넷 댓글을 안 본다. 안 그래도 감독과 선수들은 지역 예선부터 본선까지 엄청난 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격려해 주면 좋을 텐데 꼭 그렇게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아야 하는지. 그런 모습은 이제 좀 없어졌으면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