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49〉우연이 아니라 필연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료헤이(왼쪽)는 운 나쁜 하루를 보낸 은희의 부탁에 일본어로 한시를 읊조린다. CGV 아트하우스 제공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2016년)에서 은희는 서울 서촌에서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마주친다. 애정 문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하루의 끝자락, 은희는 남산에서 다시 료헤이와 만난다. 짧은 영어로 간신히 소통하던 은희는 료헤이에게 일본어로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한다. 료헤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다음 내용이다.
료헤이가 이 시를 읊조린 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동화 ‘두자춘’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전기소설 ‘두자춘전’을 윤색한 것으로, 동화에선 신선 철관자가 이 시를 읊는다. 아쿠타가와가 원작에 없던 여동빈의 시를 넣은 것이다. 동화 속 두자춘은 염량세태에 좌절해 속세를 초월하길 바랐지만 결국 신선이 되지는 못한다. 두자춘은 철관자에게 인간답게 정직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영화 속 남녀는 최악의 하루를 보낸 뒤 진심과 진짜를 이야기하며 해피엔딩을 꿈꾼다.
우리도 삶에 지친 어느 날 료헤이가 읊조리던 시가 적힌 여동빈 그림(리움미술관 소장 ‘萬古奇觀帖’)과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보면 필연일 때가 있는 것처럼, 한중일 사람들의 정신적 유전인자에 남아 있던 한시의 DNA가 동화와 영화를 거쳐 다시 우리 앞에 현현한다. 이렇게 영화로 한시를 읊는 일 역시 우연을 빙자한 필연일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