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논설실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는 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그런데 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급하지 않다.” 이 말은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긴급성과 중요성의 딜레마’라는 화두를 던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우선할까. 대부분 급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의 가치가 훨씬 클 때도 그렇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영학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사고(思考) 도구가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는 할 일의 모든 목록을 4개 그룹으로 나눈다. ‘급하고 중요한 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그것이다. 이 중 뒤의 2개는 부하에게 위임하거나(Delegate) 업무 목록에서 지워버리라(Delete)는 게 전문가들의 처방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핵심은 ‘급하고 중요한 일’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 또는 황금비율 결정에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리더가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그 조직은 성공할 수 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지만,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한 조직 안에서 소명감과 책임감이 남다른 사람, 즉 리더가 아니면 아무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7개월간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놓고는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것 같긴 한데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굵직한 국정 어젠다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경계와 균형이 무너진 탓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 없다. 15일 TV로 점검회의 모습이 생중계된 120대 국정과제도 비근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
대통령집무실에 설치된 국정과제 현황판.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이다. 대통령은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인적, 물적 자원을 쓸 수 있으나 시간만은 예외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고, 지울 것은 지워버려야 중요한 어젠다에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대책 같은 것이 국가의 미래가 걸린 그런 어젠다다. 이런 일들은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15일 3대 개혁에 대해 강한 실천의지를 밝힌 것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어떤 부분은 ‘수사(修辭)를 위한 수사’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연금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는 안(案)만 만들고 실행은 다음 정부에 넘기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안이나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피하려면 윤 대통령의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장기 과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위임하고 더 많이 지워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보기에도 숨 막히는 ‘120대 국정과제 현황판’은 ‘책임총리’의 집무실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