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420’이라는 은어가 있다. 오후 4시 20분을 일컫는 말이다.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주의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방과 후 학교 담벼락에 모여 대마초를 피운 시간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확장돼 매년 4월 20일을 대마초의 날로 기념하고, 심지어 그날 대마초를 싸게 파는 판매점도 있다. 지금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해 3분의 2 이상이 기호용 또는 의료용 대마초를 합법화했다.
▷대마초는 가격이 가장 싼 마약류여서 아무래도 접하기가 쉽다. 중독성이 담배보다 약하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대마초에 한번 손을 대면 중독성이 더 강한 코카인이나 헤로인, 케타민 등의 마약을 찾게 된다. 어둡고 위험한 마약의 길로 유혹한다는 뜻에서 ‘입문 마약(gateway drug)’으로 불린다. 미국 유학생이 학교에서 액상이나 가루, 젤리 형태의 대마를 접하고, 이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4, 5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번졌다.
▷검찰이 수사 중인 액상 대마 사건이 대표적이다. 서울 강남에서 피트니스클럽을 운영하는 A 씨는 해외에서 액상 대마를 가져와 전자담배 용기에 담아 팔았다. 이를 매입한 남양유업 창업주의 손자 홍모 씨 등 유력 인사의 자제 9명이 이미 기소됐다. 홍 씨에게 대마를 샀던 직장인 등 3명이 추가로 자수했는데, 전직 경찰청장의 아들도 있다. 검찰은 이들이 대부분 유학 시절 처음 대마를 접한 뒤 귀국 후에도 끊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약 가격의 하락으로 그동안 마약에 손을 대지 않던 젊은층이 마약에 노출되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올해 마약 사범은 역대 최대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가장 큰 특징은 초범이 많고, 10·20대 마약 사범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대마의 영향이 작지 않다. 마약 공급상 입장에선 마약 소비 연령대가 낮아지면 마약을 더 오래, 더 많이 팔 수 있다. 정부는 넉 달 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입문 마약의 접근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 있을까.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