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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2-12-19 03:00:00

〈60〉나르시스에 대한 오해




양육자가 아기에게 베푸는 사랑이 여느 사랑보다 더 고결하다고 이야기되곤 하는 이유는 아기가 무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대상을 앞에 두고, 많은 양육자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겨를이 없다.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저 미약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에너지와 관심을 온통 쏟곤 한다. 인간의 사랑 중에서 아기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가장 타자 지향적인 것 같다.

바로 이 점에서 나르시시즘이 비판 대상이 된다. 나르시시즘은 흔히 타인을 도외시한 채 자기 자신에게만 도취되는 경향을 뜻한다. 나르시시즘의 주인공인 나르시스(나르키소스·Ν]ρκισσοζ·Narcissus) 이야기가 비교적 완결된 스토리로서 등장하는 것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다. ‘변신’ 제3장에 너무 잘생긴 나머지 눈이 한껏 높아져 버린 미소년, 눈이 높아진 나머지 자신을 짝사랑하는 에코를 무시했던 미소년, 타인의 사랑에 냉담했던 미소년, 그러다가 결국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해버린, 그 결과 죽어버린 비극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좀 더 면밀하게 ‘변신’을 읽어보면, 나르시스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나르시시즘과는 거리가 있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된 나머지 손을 뻗어 그 대상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물에 손이 닿을 때마다 생기는 파동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결국 ‘변신’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의 핵심은 실체가 아닌 허상을 사랑하는 일의 고통이다. 허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랑이 강렬해도, 혹은 그 사랑이 강렬하기 때문에, 끝내 충족감을 얻을 수 없다. 갈증을 달래기 위해 샘을 찾은 나르시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더 심각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자기 이미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허망한 일이라는 메시지,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메시지, 이미지와 실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

나르시스는 시대가 변하면서 달리 해석된다. 먼저 1500년경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된 태피스트리를 보자. 가장 먼저 관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태피스트리에 가득한 꽃들이다. ‘변신’에는 샘 주변의 나무와 풀에 대한 묘사는 있어도 꽃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럼에도 이처럼 화려하게 많은 꽃들을 묘사한 것은 이 태피스트리가 중세 후기 유럽에서 유행한 밀플뢰르(millefleur) 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개의 꽃’이라는 말뜻에 걸맞게 밀플뢰르 양식은 수많은 꽃들로 배경을 수놓는다.

자기애의 대명사인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미소년이 자기 자신임을 알아챘을까, 몰랐을까. 허상을 사랑하면 고통이 따른다는 나르시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샘에 비친 나르시스의 모습을 묘사한 1500년경 태피스트리.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궁정풍 사랑’, 즉 충족 불가능한 사랑을 반영한 듯하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이 화사한 꽃밭에서 나르시스는 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세 귀족 복장을 공들여 차려입고서, 정교하게 축조된 샘에 비친 허상을 응시하고 있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사랑이 왜 중세 귀족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궁정풍 사랑(courtly love)’을 감안해야 한다. 충족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묘사가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쉽게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성이 아니라, 항상 거절하는 여성에 대한 찬미가 당시 예술 작품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스위스의 문화사가 드니 드 루즈몽에 따르면 궁정풍 사랑 묘사 속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이 아니다. 남성이 영원히 그리워하는 이상으로서 여성이 남성 위에 군림하고 있다. 밀플뢰르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저 중세 귀족 청년은 바로 그러한 궁정풍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지만, 그 고통 자체를 사랑하게 된 변태적인(?) 남자의 초상이다.

1595년경 그려진 카라바조의 나르시스는 어두컴컴한 배경 속 나르시스의 모습을 부각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저 밀플뢰르 태피스트리가 만들어진 지 약 100년 뒤에 그려진 카라바조의 나르시스를 보자. 밀플뢰르 태피스트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배경이다. 카라바조 특유의 어두컴컴한 양식적 배경은 나르시스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개의치 않는다.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미소년에게 매혹된 순간, 실로 그 주변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주변은 어둡게 물들고, 오직 미소년만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 스크린에 집중하는 것처럼 관객 역시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나는 나르시스 한 사람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1903년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나르시스. 나르시스를 짝사랑하는 에코(그림 왼쪽)와 물에 비친 자기 모습만 바라보는 나르시스의 거리감이 눈에 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나르시스는 카라바조의 그림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일단 밝고 넓은 배경을 제시하기 때문에, 나르시스는 전체 그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나르시스는 그림의 정중앙에조차 있지 않다. 그림의 좌우에 나르시스와 나르시스를 짝사랑한 에코를 배치한 뒤, 정중앙에는 그들 간의 간격을 드러냈다. 이 그림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에코나 나르시스라기보다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그들 간의 거리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나르시스를 에코가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다. 워터하우스의 이 그림이야말로 나르시시즘에 걸맞은 묘사를 보여준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신경 쓰는 나르시스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만 사랑했던 존재로서만 나르시스를 규정하는 일은 너무 가혹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어디에도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미소년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아차렸다는 말은 없다. 나르시스는 끝까지 그 미소년이 타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고 여겨진 존재)을 사랑하다가 죽은 것이다. ‘변신’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타인에게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 세상 많은 연인들을 닮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