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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 창원 팽나무 꾸준히 보호…천연기념물 지키는 당산나무할아버지들

입력 | 2022-12-19 11:36:00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됐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어요. 늘 해오던 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내 자식처럼 나무를 지켜볼 뿐입니다.”

주민 60여 명이 도란도란 모여 사는 경남 창원 북부리. 이 작은 마을의 이장 윤종한 씨(60)는 올 10월 또 하나의 중책을 맡았다. 문화재청이 10월 이 마을의 보호수 ‘창원 북부리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 그를 ‘당산나무 할아버지’로 임명했다.

올 10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올 3월부터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그루가 뿌리 내린 마을마다 나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킬 당산나무 할아버지를 임명하고 있다. 현재까지 윤 씨를 포함해 전국에 총 85명.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직원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무의 상태를 알리고, 산불이나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 때 ‘비상대기조’로 나무 곁을 지키는 가장 가까운 이웃 안전망이다. 

특히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나무다. 수령이 500년가량 되는 이 나무는 영하를 맴도는 한파가 찾아온 16일에도 관광객 수십 명이 나무를 보러 왔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던 7, 8월부터 올 가을까지는 매일 1000여 명, 500대가 넘는 차량이 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16일 오후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 앞에서 ‘당산나무 할아버지’ 윤종한 씨가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나무를 지키는 보호자인 그는 “지금도 매일 아침 저녁 나무를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관찰한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날 동아일보와 만난 윤 씨는 두 눈이 붉게 충혈 될 정도로 바쁜 농번기에도 나무 주변 언덕에 올라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있었다. 나무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면서 땅에 떨어진 쓰레기는 없는지, 혹여 나뭇가지에 생채기가 나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봤다. 그는 “최근 3, 4개월 동안은 생업을 뒷전으로 미뤄 두고 매일 이 나무를 보러 오는 인파를 관리하기 위해 주차 요원도 됐다가 청소부도 됐다가 안전관리 요원 노릇도 하고 있다”며 웃었다. 

“혹시라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내 자식처럼 돌봤어요. 하루가 지나면 4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8포대가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으니까요. 바쁠 땐 화장실 갈 틈도 없었어요.” 

ENA의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창원 북부리 팽나무의 모습. 화면캡처


돈 한 푼 받지 않는 가욋일…. 하지만 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이전과 달라진 건 없다”고 말했다. 윤 씨는 “이 마을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 해 두 번씩 나무 주변에 자라난 잡초를 제거하고 10월이면 십시일반 돈을 걷어 당산제를 지내왔다”고 했다. 실제 그의 집은 나무가 심어진 언덕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데 나보다 오래 이 마을에서 살아온 나무를 나 몰라라 하고 살 수는 없다”는 얘기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제가 자식들에게 아파트나 빌딩은 물려주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500년을 살아온 저 나무 한 그루는 지켜줄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저 나무와 같은 자연유산 아닐까요.”

천연기념물 경북 ‘울진 화성리 향나무’를 지키는 당산나무 할아버지 이재욱 씨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대대손손 물려줄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화마가 덮친 새벽 집 대신 나무 곁을 지킨 이도 있다. 올 3월 경북 울진 화재 때 ‘당산나무 할아버지’ 이재욱 씨(59)는 집 창고가 전부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연기념물 ‘울진 화성리 향나무’가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농기구 30여 대를 보관하고 있는 60평 창고를 잃어 4억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그는 “창고는 다시 지으면 그만”이라며 웃었다. 

“저와 문화재청 직원, 소방대원들이 마지막 불씨를 잡을 때까지 일주일 넘게 나무 곁을 지켰어요. 그 바람에 정작 제 집 창고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불길에 무너진 마을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이 나무는 불에 타면 영영 사라지는 거잖아요. 고민할 게 뭐 있어요. 나무를 지켜야죠.”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