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국내로 들여온 유교책판 61점 중 주서강록간보 책판 1점. 10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방문한 이남옥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팀장이 소장자의 집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퇴계 이황(1501~1570)이 주자학을 만든 송나라 주희의 편지를 해석한 내용이 담긴 ‘주서강록간보’의 한 구절이다. 주서강록간보는 이황의 제자들이 먼저 정리한 ‘주자서절요강록’을 조선후기 안동 출신 학자 이재(1687~1730)가 수정·보완한 것으로 1785년 호계서원에서 6권 3책으로 간행됐지만, 지금까지 인쇄본만 전해졌다.
18세기 조선 후기 지성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주서강록간보의 유교책판 일부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주서강록간보을 비롯해 조선 후기 안동 등 영남 지역에서 판각됐지만 인쇄본만 남아있던 유교책판 총 61점을 11월 미국에서 국내로 들여와 21일 공개했다.
최근 미국에서 국내로 들여온 유교책판 주서강록간보의 인쇄본.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환수된 책판은 총 4종이다. 주서강록간보(27점)을 포함해 1916년 발간된 박사규(1826~1899)의 시문집인 ‘상은집’ 책판 20점 , 임진왜란 의병장 최응사(1520~1612)의 시문집인 ‘유정일집’(1915년) 책판 12점, 봉화 출신 학자 강헌규(1797~1860)의 시문집인 ‘농려집’(1895년) 책판 2점 등이다.
이중 농려집을 뺀 3종은 책판 자체가 국내에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아 이번에 존재가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농려집은 2015년 진흥원이 전국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6만 4226점에 포함돼 ‘한국의 유교책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다.
환수 과정에서 책판의 학술적 가치를 자문한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교수는 “유교책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후대에 학문적 성과를 전승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특유의 기록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들여올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주서강록간보를 제외한 문집들은 조선시대에 남겨진 문집이 워낙 많아 아직 번역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기획처장은 “목판은 간행 시 막대한 물력이 소모되는데, 조선 말기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위선 사업을 하려는 가문 중심으로 문집 간행 사업을 활발했던 상황을 보여 준다”며 “주서강록간보는 조선 후기에 이뤄진 주자서 연구를 볼 수 있는 핵심 자료”라고 말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이남옥 고전국역팀장(오른쪽)이 소장자의 집에서 유족과 함께 유교책판 인수증을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팀장은 “민속품에 관심이 많던 고인이 생전에 수집한 유물이 집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18~20세기에 판각된 책판이 어떻게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됐을까. 소장자는 올 1월 사망한 미국인 프랭크 윌리엄 존스다. 1980년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근무한 그는 한국에 올 기회가 많아 목판뿐 아니라 다양한 유물을 수집한 것으로 전해졌다. 10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 책판 상태를 직접 확인한 이남옥 고전국역팀장(책임연구위원)은 “유물의 출처와 가치를 몰랐던 유족들이 자산 처분을 위해 페이스북 계정에 유물을 올렸고 이를 본 임수아 미국 클리브랜드 미술관 큐레이터가 가교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최근 미국에서 들여와 21일 처음 공개한 유교책판 61점.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국외소재문화재단에 따르면 약탈이나 불법반출, 선물 등을 통해 현재 해외로 유출돼 있는 우리 문화재는 21만 4208점에 이른다. 이중 미국 박물관이나 미술관,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가 5만 4185점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국내로 환수된 문화재는 1086점에 불과하다.
한국국학진흥원 정종섭 원장은 “환수한 61점의 유교책판은 최첨단 설비를 갖춘 목판 전용 수장고인 ‘장판각’에서 보존 관리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문화재 환수 사업에 적극 협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