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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딛고 성공한 헬렌켈러? 생계위해 쇼공연 전전했다

입력 | 2022-12-23 10:56:00

◇거기 눈을 심어라 / M.리오나 고댕 지음·오숙은 옮김 / 420쪽·2만원·반비




1924년 미국에서 버라이어티쇼 공연을 하던 시기의 헬렌 켈러와 설리번. 반비 제공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정보를 얻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시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저자는 ‘시각이 사유를 좌우한다’는 굳건한 믿음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본인이 ‘시각을 잃은’ 이였기 때문이다. 비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으나 10대 때 망막조직 위축을 일으키는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렸고 차츰 시력을 잃었다. 현재 50대로 추정되는 저자는 희미하게 빛 정도만 분간할 수 있다. 

저자는 “흔치 않은 경험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고 말한다. 대부분 장애인에게 사회가 요구해온 ‘장애를 딛고 일어난 성공 스토리’가 아닌 ‘눈멂’이란 자체에 집중해 문화사를 쓰기로 했다. 작가이자 공연예술가, 문학연구자인 그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각 중심주의’ 관점에서 시각장애를 편향적으로 다뤄온 문화예술사를 샅샅이 톺아본다. 

미국의 시각장애 음악가이자 프로듀서인 스티비 원더는 1950년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생활을 하다 산소 과다 공급으로 인한 미숙아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반비 제공

“보는 것이 곧 지식이요, 보지 못하는 것은 무지다.” 고대 그리스인의 이런 사고는 시각장애인을 천부적인 시적 재능과 예지력을 가진 이들로 여기게 했다.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무지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시각장애인은 다른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눈먼 음유시인’으로 알려진 호메로스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조차 대표작 오디세이아에서 시각장애인을 초월적 재능을 가진 음유시인으로 그렸다. 요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각장애인 예언자’는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질병은 은유가 아니다. 질병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그리고 가장 건강하게 아프려면, 은유를 없애야 하며 은유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수전 손태그(1933~2004)가 1978년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쓴 글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시각장애인이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은유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헬렌 켈러(1880~1968)다. 일반적으로 켈러는 장애라는 역경을 이겨낸 아이콘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이는 그의 생을 반도 제대로 못 본 것이다. 켈러는 20대 출간한 자서전으로 성공으로 거뒀지만, 결국 40대 때부터는 생계를 걱정하며 평생의 스승 앤 설리번과 버라이어티쇼 공연을 전전해야 했다. 또 켈러의 강렬한 열애나 적극적인 정치활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작위적으로 만든 ‘시련을 극복한 성스러운 시각장애인’이란 이미지가 덧칠해졌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인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 앞에 등장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영국에서 활동한 스위스 출신 화가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1741~1825)가 그렸다. 반비 제공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눈이 보이지 않을 뿐, 시각장애인 역시 각자의 개성이나 존재 방식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로만 타인을 바라보는 건 또 다른 차별이자 억압일지도 모른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