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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나대로… 후회없이 살았다”

입력 | 2022-12-24 03:00:00

‘나대로 선생’ 이홍우 화백 별세
본보 시사만화 27년 동안 연재
대중에 解憂所-정치인에 촌철살인
‘경포대’-‘삼팔선’ 등 유행어 화제




동아일보에 27년 동안 연재했던 네 컷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사진)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올해 9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된 뒤 합병증으로 장기간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유족은 23일 “‘나는 죽을 때까지 나대로였다’, ‘후회 없이 멋지게 살았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밝혔다.

부산 출신인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시사만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상경해 당시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던 김성환 화백(1932∼2019)의 전시회를 찾아갔던 일은 유명하다. 고교 때부터 학생 잡지에 고정적으로 만화를 그렸으며, 1967년 서라벌예술대 2학년 때 대전 중도일보에 ‘두루미’를 연재하기도 했다.

1991년 11월 29일자에 게재된 ‘나대로 선생’.

고인은 ‘고바우 영감’의 바통을 이어받아 1980년 11월 12일부터 동아일보에 ‘나대로 선생’을 연재했다. 평범한 중산층 가장인 나대로는 당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나대로 선생은 대중에게 해우소(解憂所) 같은 쾌감을 줬지만, 정치인이나 공직자 등에게는 쓰라린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1991년 당시 정부를 ‘외교 굽신, 경제 망신, 치안 불신, 정책 등신, 날치기 귀신, 국민 배신’이라며 ‘6공 6신’이라 부른 건 오랫동안 회자됐다. 비판에는 성역이 없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폭력 사건에 대해 “맞고 나니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더군”이라고 해 보안사로 끌려갔다.

하지만 검열을 뚫고 할 말은 했다. 1986년 11월 건국대 시위 때 학생 1290명이 구속되자 그는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고 돌아오니 다시 낙엽이 쌓여 있는 내용의 만화를 그렸다. 시위대를 잡아넣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 것. 고인은 “매일 권력에 맞서 작업하며 단두대에 올라가는 심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협박과 항의를 받는 건 다반사였다. 1997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를 다루며 “대쪽 집안이라 속이 비어 몸무게가 안 나간다”고 그려 항의를 받았다. 읍소도 적지 않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92년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시절 얼굴에 있는 검버섯을 빼 달라고 요청했다.

세상에 대한 그의 눈은 날카롭고 정확해 풍자가 현실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6대 국회에서 자민련이 17석으로 교섭단체를 못 만들자 “3명 꿔오면 되지”라고 그렸는데, 그해 말 실제 국민회의 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이적했다.

그는 숱한 유행어도 만들었다. 2005년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失政)을 지적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를 비롯해 조기 퇴직을 풍자한 ‘삼팔선’(38세도 선선히 사표를 받아준다)은 큰 화제를 모으며 유행어가 됐다.

고인은 “해학과 재치, 그리고 발상의 전환과 반전의 묘미가 있어야 좋은 시사만화”라고 말했다. 그는 재기 발랄한 풍자, 유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을 챙겨 봤고, 항상 책 신문 영화 등을 통해 동시대 이슈를 섭렵하려 애썼다. 늘 긴장하다 보니 하루에 담배를 3갑이나 피웠다. 27년 동안 사랑받은 나대로 선생은 2007년 12월 26일 제8568회로 마무리됐다.

2011년부터 2년간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 만화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시사만화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2015년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제1회 고바우 만화상, 제16회 대한언론인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최근까지도 한 매체에서 시사만화 ‘도두물 선생’을 그려온 고인은 코로나19 확진 뒤에도 마감을 지킬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날은 1년에 며칠 안 됩니다. 정말 미치지 않았으면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사만화가 미치도록 좋습니다.”(2007년 11월 5일 동아일보 인터뷰)

유족으로는 부인 이경란 씨와 아들 상민 시공사 만화팀 편집자, 딸 지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가 있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8시. 070-7816-0349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