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메이저 퀸 전인지, 슬럼프 극복 도와준 덤보와 갤러리에 서다

입력 | 2022-12-28 03:00:00

골프와 그림의 시너지가 주는 긍정 에너지, 보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길…




직접 그린 그림으로 ‘앵무새, 덤보를 만나다’ 전시(1월 7일까지)를 여는 전인지 선수. 조영철 기자

전인지(28)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메이저 3승을 포함해 통산 4승을 수확한 선수다. LPGA 투어 5대 메이저대회 가운데 2015년 US 여자오픈, 2016년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각각 우승했고, 상승세가 뚜렷했던 올 6월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기세를 몰아 8월에는 AIG 위민스 오픈에 출전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문턱까지 갔지만, 아쉽게도 공동 2위를 차지하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은 5대 메이저대회 가운데 4개 대회에서 우승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 덕분에 ‘메이저 퀸’이라는 수식어까지 생겼다.

그런 전인지 선수가 필드가 아닌 갤러리에 정장을 입고 섰다. 앵무새 작가로 유명한 박선미 작가와 함께 컬래버레이션 전시회 ‘앵무새, 덤보를 만나다: 호기심이 작품이 될 때’를 마련한 것. 두 사람은 앵무새와 덤보라는 각자의 상징적 대상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와 삶의 다양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전시회는 2022년 전인지의 골프 투어 인생 10주년에 이루어진 행사라 더욱 뜻깊다. 그간 프로골프 선수로서 우승컵을 높이 들었던 화려한 시간도 있었지만, 슬럼프에 빠진 4년여의 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본화랑에서 1월 7일까지 열린다. 다음은 전인지 선수와의 일문일답.

작가 데뷔 축하드려요. 프로골프 선수로 필드에 서다 작가로 작품 앞에 선 기분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신나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제 표정이 밝았나 봐요. 그림을 시작한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진정성을 담아 작품을 완성했어요. 평소 필드 위에서 밝은 미소를 지어 ‘덤보’로 불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성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 ‘108(백팔번뇌)’와 ‘Fall Line(폴 라인)’에는 실제 선수 생활에서 마음이 무척 힘들고 괴로울 때의 상황을 담았습니다.

작품 속에 별명인 ‘플라잉 덤보’를 자신을 투영한 매개체로 사용했습니다. 덤보는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호기심도, 질문도 많다고 스윙 코치님이 지어준 별명이에요. 그 별명에 ‘제가 날아올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해져 ‘플라잉 덤보’라는 이름의 팬카페가 생겨났죠. 심지어 제 이름 전인지 대신 ‘덤보 프로’로 불릴 때도 많아요. 어릴 때는 디즈니 캐릭터 ‘밤비’처럼 귀여운 캐릭터면 더 좋을 텐데’ 생각했지만, 지금은 덤보라는 별명이 없었다면 작품이 나올 수 없을 만큼 애정이 커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되찾은 나’입니다. 박 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되찾았어요.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했죠. 골프선수인 직업을 살려 코스 위 제 모습을 그렸어요. 그래서 밑바탕을 초록색으로 칠했는데, 기존에 있는 색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만들었어요. 덤보의 귀 안쪽도 선물 포장지 같은 느낌으로 화려하게 표현했어요. 선생님과의 인연이 제게 선물처럼 다가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모자에는 저의 15번째 우승이라는 의미로 15개의 점을 찍었죠. 이렇게 자신을 되찾은 제가 앵무새들과 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라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배운 지 1년밖에 안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뭔가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그전에는 주로 운동화에 그림을 그려서 종종 선물하기도 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제가 커스텀한 운동화를 만나보실 수 있어요.


그림 통해 스스로 성찰하게 돼


전인지 선수가 가장 의미있는 작품으로 꼽은 ‘되찾은 나’. 조영철 기자

전인지 선수가 붓을 들게 된 건, 2021년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다. 그는 2018년 10월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우승 이후 성적 부진에 시달렸고,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그해 12월 운명처럼 박선미 작가를 만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붓을 잡던 날 전인지는 8시간 동안 몰입할 정도로 그림에 푹 빠졌고, 박 작가가 인정할 정도의 예술 세계를 점차 구축해나갔다.

박선미 작가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1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박선미 작가님의 개인전이 열렸어요. 그때 제가 전시회에 왔다가, 선생님 작품 중 하나인 ‘9번째 지능’이라는 그림을 1시간 넘게 쳐다봤죠.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제게 먼저 다가오셔서 “인지 씨는 9번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한마디가 굉장히 큰 힘이 됐어요. 당시 깊은 슬럼프에 빠져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멈췄던 때였어요. ‘내가 왜 골프를 해야 하지? 다시 우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슬픔에 가득 차 있다가 나중에는 그런 고민조차 들지 않는, 아무 생각이 없던 시기였죠. 그 자리에서 “그림을 정말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선생님께서 선뜻 “나중에 작업실에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첫 수업 시간을 기억하시나요.


작업실에 간 첫날 8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어요. 선생님은 제가 골프선수다 보니까 ‘작업실에 놀러 와서 차 마시고, 그림 좀 그리다 가겠지’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제가 너무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놀라셨던 것 같아요. 그날 완성한 작품을 집에 가져갔는데,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선생님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고 했고, 그 모습에 선생님은 제게서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구나, 그림에 진심이구나’를 느끼셨대요. 그렇게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고, 선생님께서는 제게 그림 그리는 법과 노하우를 알려주셨어요.

전인지 선수는 “작가는 일종의 ‘부캐(부캐릭터)’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단호히 “나는 그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럴듯한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실제로 전인지는 어느 때보다 바빴던 2022년, 투어와 그림 작업을 병행하면서 보냈다. 그는 “골프와 미술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한국 딜로이트 그룹은 전시 오픈 전날 전 선수와 함께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전시회에는 전인지 선수가 직접 커스텀한 운동화와 스케치 등도 전시됐다. 조영철 기자


그림과 운동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투어 참여로 외국에 머무는 기간이 길었죠. 선생님께서 제 상황을 이해하시고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여행용 스케치북과 연필, 색연필 등을 주셨어요. 그래서 투어 중에도 비행기에서 틈틈이 스케치할 수 있었죠. 선생님과 매일 연락하면서 작품 이야기를 나누었고, 투어가 끝나면 공항에서 곧장 작업실로 와 계속 그림을 그릴 정도였어요. 전시회 준비 막바지에는 20시간 넘게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어요.

선수 생활에 그림 작업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요.

많은 사람이 삶의 밸런스를 맞추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취미 활동을 하잖아요. 저 역시도 투어 생활하면서 여러 취미 활동을 시도했어요. 근데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취미는 오래가지 못하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건 그만큼 제가 몰입한 거잖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내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고 나를 더 들여다보게 됐어요.

앞으로도 ‘전인지 작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까요.

선생님께서도 항상 ‘제자님’ ‘선수님’이라고 불러주셨는데, 최근에는 “이제 색도 잘 쓰게 된 것 같다. 작가님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셨어요. 저는 앞으로도 진지하게 작품을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아직 배울 게 굉장히 많고, 제가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림 작업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골프선수들이 꼽은 골프선수


대만 팬이 선물한 코끼리 캐릭터 덤보 모양의 클럽 보호주머니를 들고있는 전인지 선수. 동아DB

미국 ‘USA 투데이’는 전인지의 3번째 메이저 우승을 ‘올 시즌 LPGA 투어 10대 뉴스’ 중 하나로 꼽았다. 올해 6월 그는 오랜 시간의 슬럼프를 깨고 3년 8개월 만에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당시 필드 위에서 쏟은 눈물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짐작게 했다. 11월에는 LPGA 투어 파운더스 상(Founders Awards)도 수상했다. 이는 LPGA의 정신, 이상과 가치를 가장 잘 실천하고 보여준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동료들의 의견을 모아 수상자가 결정되기에 의미가 크다.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우승 소식을 듣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사실 다시 우승하면 안 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공을 홀에서 집어 올리는 순간, 4일 동안 함께한 캐디분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바로 눈물이 났어요. 슬럼프 기간 동안 저를 믿고 기다려준 팬들, 스폰서들, 가족, 팀원들에게 빨리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그러지 못하는 저 자신이 밉기도 했고요. 그런 힘들었던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것 같아요.

전인지 선수에게 그날의 우승은 어떤 의미였나요.

새로운 목표를 갖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 AIG 위민스 오픈에서는 아쉽게 준우승(공동 2위)했지만, 내년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었고요.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꼭 이룰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제가 느끼는 긍정의 에너지를 그림에도 담았어요. 그림을 보시는 분들도 좋은 에너지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골프도, 그림도 그런 마음으로 오랫동안 하고 싶어요.

우승으로 ‘제2의 전성기’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를 어떻게 채워나갈 생각이신가요.

어떻게 살 것인지를 뚜렷하게 정하지는 못했어요. ‘벌써 투어 10년 차가 되었구나’를 느낄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흐르거든요. 어릴 때는 단기, 장기로 목표를 적은 노트가 있었어요. 그중에는 이룬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있어요. 때로는 목표와 전혀 다른 걸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간 인생이 제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저 매 순간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만나는 사람과의 인연도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행복하고 소중하고 즐겁게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싶어요.

동료들이 주는 LPGA 투어 파운더스 상은 의미가 더욱 각별할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말 한마디, 보여주는 행동 하나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절감해요. 그만큼 부담감이 크죠. 좋은 에너지와 영향력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왔는데, 이 상을 통해 그런 마음을 잘 전달해온 것 같아 뿌듯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슬럼프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빨리 벗어나야지. 이러고 있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면 더욱 힘들어졌어요. ‘이 시간조차 인생에선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생각했던 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업 앤드 다운이 있잖아요. 다시 올라가는 순간이 있다는 믿음으로 힘든 시기를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습니다. 사실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는 주변의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저 또한 지인들이 건네는 긍정적인 말이 되게 날카롭게 들렸거든요. 오히려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미안하더라고요. 그런 제 옆에 끝까지 있어줘서 고마웠죠. 슬럼프가 결국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두경아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