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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대통령이 곱씹어야 할 ‘고이즈미식 연금개혁’의 이면[광화문에서/유근형]

입력 | 2022-12-28 03:00:00

유근형 정책사회부 기자


“일본은 운이 좋았다.”

최근 일본 도쿄에서 만난 ‘연금학계의 대부’ 겐조 요시카즈(權丈善一) 게이오대 상학부 교수는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부의 연금개혁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국내에서 ‘롤 모델’이라 평가받는 일본 사례가 사실은 운이 좋았던, ‘운칠기삼’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농담조로 “개혁이 그렇게 빨리 될지 예상치 못했다. 그 결과 몇몇 고위 관료들의 은퇴 시점이 빨라졌다”며 웃었다.

연금개혁에 번번이 실패한 한국에 일본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일본은 후생연금(한국의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한국(9%)의 2배 수준인 18.3%까지 올렸다. 경제 상황이 나쁘면 자동으로 연금액을 조절하는 장치도 뒀다. 증세(소비세)까지 단행해 연금재정으로 충당했다. 어려운 개혁들을 단칼에 해냈다.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정치 상황이 연금개혁을 도왔다는 분석이 많다. 집권당인 자민당은 개혁 논의 직전인 2003년 11월 총선거에서 안정적인 과반을 달성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과 자민당의 연금 공약이 거의 비슷해 야당이 개혁에 반대할 명분도 부족했다. 여기에 국민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이슈가 터져 나왔다. 고이즈미 내각의 주요 각료들과 당시 야당 대표의 후생연금 보험료 미납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야가 도덕성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개혁의 세부 내용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개인기’도 빛을 발휘했다. 한 일본 학계 인사는 “고이즈미 총리는 연금을 잘 몰랐다”며 “하지만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해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이를 토대로 연금개혁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득했다”고 회상했다. 운에 실력이 더해지면서 일본 정부 연금개혁안은 국회에 제출된 지 단 4개월 만에 통과됐다.

한국은 어떤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충분치 못하고, 의회는 여소야대 국면이다. 윤 대통령 화법에 대한 호감도도 높지 않다. 연금개혁이 기댈 것이 운밖에 없다는 자조가 나올 법하다.

그럼에도 현 집권 세력에겐 절실함을 읽기 어렵다. 정부는 2024년 총선을 6개월 앞둔 내년 10월에나 개혁안을 낸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 나온들 권력 투쟁의 회오리 속에서 생산적 논의가 진척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이 최근 노동개혁에 더 집중하는 게 연금개혁에 회의적인 정부 내 기류가 반영된 행보라는 평가도 있다.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하면 연금개혁 동력이 생긴다’는 희망 섞인 전망도 있지만, 표 계산에 바쁜 차기 주자들이 적극 도울지 걱정이 앞선다.

개혁은 말만으로 할 수 없다. 일본보다 상황이 나쁘다면 그보다 두 배, 세 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운영되는 내년 4월 전에 정부안을 내고, 윤 대통령이 직접 뛰어다니며 국민과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인기는 없어도 반드시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선언이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일본까지 찾아온 기자에게 “5년 단임 대통령에게 연금개혁을 기대하는 게 대단하다”고 말한 일본 전문가의 불길한 전망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근형 정책사회부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