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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어졌다고 아무것 안하면 정말 끝… 17년 시나리오 쓰고 또 써”

입력 | 2022-12-29 03:00:00

[2022 꺾이지 않은 마음]〈4〉51세에 영화감독 데뷔 안태진
‘왕의 남자’ 조감독… 17년만에 메가폰
택배-우유배달하며 새삼 열정 느껴
‘올빼미’ 성공 후 연출 제의 쏟아져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2005년 영화 ‘왕의 남자’ 조감독으로 일한 후 17년 만에 감독으로 데뷔한 늦깎이 신인이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어 크게 좌절했다”며 “거창한 목표는 없지만 관객들이 적어도 영화관에서는 현실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안태진 감독은 신문 TV에서 자신이 연출한 영화 ‘올빼미’를 소개해도 남일 같기만 하다. 다른 감독이 만든 영화 얘기처럼 들린다. 안 감독은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누가 안태진이라는 이름을 말해도 내 이름 같지가 않다”며 “내 영화가 개봉된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올빼미’는 인조실록에 실린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에 관한 기록에서 출발한 스릴러물이다.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는 기록에 빛이 없을 때만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는 가상 인물과 탄탄한 서사를 더해 흡인력 넘치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손익분기점 210만 명은 일찌감치 넘었고, 27일 기준 관객 313만 명을 모았다. 14일 ‘아바타: 물의 길’이 개봉하기 전까지 21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올해 개봉 영화 중 최장 기간 1위 기록을 세웠다. 그는 “‘아바타만 아니었어도…’ 하는 아쉬움이 많다”며 웃었다. 평단과 관객은 ‘올빼미’에 대한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섬세한 연출력과 이야기의 폭발력을 모두 보여줬다는 평가다.

안 감독은 한국 나이로 올해 51세. 또래 감독들이 거장 반열에 오르는 시기에 ‘올빼미’로 데뷔한 신인이다. 그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2005년)의 조감독이었다. ‘왕의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넘어서면서 그도 주목받았다. 그는 “당시만 해도 2년 안에 데뷔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첫 메가폰을 잡기까지 무려 17년이 걸렸다. ‘왕의 남자’ 촬영이 끝난 후 시나리오 집필에 착수했고 1년 만에 ‘다이버’라는 가제의 누아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를 영화사에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시나리오를 받았으면 답을 줘야지’ 하며 욕도 많이 했어요. 생각해 보니 피드백이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었던 거죠.(웃음)”

야심 차게 써내려간 첫 시나리오는 졸지에 혼자만의 이야기가 됐다. 이후에도 작업은 번번이 엎어졌다. ‘올빼미’ 전까지 쓴 시나리오나 트리트먼트(시놉시스보다 더 구체화된 개요)만 10편. 모두 투자와 캐스팅에 실패했다. 3년 가까이 매달려 완성한 액션 누아르 시나리오는 2011년쯤 유명 배우를 섭외해 제작 문턱까지 갔지만 투자를 받는 데 실패했다. 이때 가장 크게 좌절했다. 다행히 그 좌절은 짧고 굵게 끝났다.

“그렇게 엎어진 후 가장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게 됐어요. 엎어졌다고 아무것도 안 쓰면 다 끝나는 거잖아요. 뭐라도 해야 희망이 생기니까…. 노트북부터 폈죠.”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여겼을 때 희소식이 날아왔다. ‘올빼미’가 캐스팅과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는 것. 지난해 초였다. 어렵게 잡은 기회인 만큼 영혼을 갈아 넣었다. 지난해 촬영 종료 이틀 전까지 시나리오를 고쳤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감독 혼자만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배우, 스태프의 사소한 의견까지 반영해 수정을 거듭했다. 그는 “겁이 나서 시나리오를 계속 고쳤다”며 “영화가 개봉하면 나는 매장되는 것 아닌가, 관객들이 이 이야기를 납득 못 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와 싸우며 촬영했다”고 했다. “망했다. 큰일 났다”고 매일 스스로를 다그치며 빈틈을 하나둘 메워갔다.

‘왕의 남자’를 개봉한 2005년에 결혼한 아내는 회사를 다니며 17년간 가장 역할을 했다.

“아내는 한 번도 돈 벌어 오라거나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게 참 고마워요. 대신 격려도 안 했어요.(웃음)”

그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택배 일을 했다. 당시 맡은 구역이 하필 충무로였다. 영화사에 배달 가면 물건만 놓고 스리슬쩍 나오길 반복했다. 새벽 우유 배달로 한 달 100만 원가량 벌기도 했다. 당시 깨달은 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영화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데뷔작이 잘못되면 다시는 영화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불안감은 모든 내공을 쏟아붓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불안과 사투를 벌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영화 시작 50분쯤 소현세자가 독살당하고 내의원 침술사 경수(류준열)가 이를 목격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관객은 스크린 속 세상에서 내달리게 된다. 안 감독은 “그 장면에서 관객을 잡아채지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며 “3번 혼자 영화관에 가서 관객 반응을 보니 그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시더라. 휴대전화를 보는 분도 없어서 뿌듯했다”며 웃었다.

“가장 기분 좋은 평은 ‘팝콘 사들고 가서 하나도 못 먹었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목표한 걸 이뤘다고 입증해주는 평이라 정말 좋았어요.”

17년간 꺾이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꽃을 피웠다. 연출 제의가 쏟아지고, 과거 거절당했던 시나리오도 재조명받고 있다. 그는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했다.

그는 좌절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솔직히 못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루틴의 힘’을 강조했다.

“눈 뜨면 카페에 가 뭐든 글을 썼어요. 사소하더라도 내일 해야 할 일을 만들어둔 것 역시 버텨낸 힘이 됐습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려고 했죠. 17년간 수영도 계속했습니다. 체력이 받쳐줘야 마음이 꺾이지 않으니까요.”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