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저는 이제 시한부가 된 건가요?” 암환자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시한부(時限附). 사전적 의미로는 ‘일정한 시간의 한계를 둠’이라는 뜻이다. 나는 시한부라는 말을 무척 싫어한다. 시한부라는 단어에는 이상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시한부라는 단어는 건강인과 비건강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38선을 그어버리고 이 두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이 38선이 단절과 타자화(othering)의 기준선이 된다. 우리는 타자화를 통해 내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건강한 우리’와 내가 멀리하고 싶은 ‘건강치 못한 남’을 구분하고 남을 38선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낸다. 시한부가 그어놓은 38선은 너와 나를 단절시킨다. 너는 그렇게 나의 타자가 된다.
타자화를 통해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을 낳고 ‘그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 아픈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타자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사회적으로 허용 가능한 낙인을 찍어도 된다는 착각을 갖게 된다. 사회적 낙인은 아픈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더욱 분리하고 이는 다시 고정관념과 편견을 낳는다.
저 사람은 아픈 사람, 말기암 환자, 불쌍한 사람, 곧 죽을 사람, 시한부 인생. 반면 나는 건강한 사람, 괜찮은 사람, 시한부 아닌 사람. 이런 이분법적 인식은 나는 ‘그들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강력한 인식을 준다. 하지만 평균수명만큼 살 때 3분의 1의 확률로 암에 걸리는 세상에서 나 역시 언젠가는 그들처럼 암환자가 될 확률은 지극히 높다. 내가 어쩌다가 암환자가 되는 순간, 내가 타자화하고 낙인찍었던 그들이 되는 순간에는 나의 절망감이 더 커진다. “제가 이제 시한부가 된 건가요?” 이런 질문이 절로 나온다. 내가 나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38선 너머의 그들이 되었다니….
사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이다. 너도 시한부 나도 시한부. 세상에 시한부 아닌 사람은 없다. 그저 자신은 시한부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는 이제 시한부가 된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도 시한부예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