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이유로 내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이토록 멀리 떨어져 사는 건지. 내가 쓰는 책들도 모두 스페인어인데.
왜 한국에서 사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집중한다. 다행히 그 이유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나, 사진가 김효연의 ‘감각 이상’이라는 책 덕분이다. 작가는 경남 합천과 일본을 오가며 히로시마 원폭에서 살아남은 한국인 생존자들의 궤적을 쫓는다. 달걀 몇 알을 들고 있는 한 노인의 두 손을 찍은 사진이 어떤 이미지보다도 그 잔인했던 사건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둘, 후암시장 귀퉁이에서 김치를 파는 할머니 덕분이다. 한국에서 맛본 최고의 김치로, 쌀밥에 콜롬비아식 렌틸콩 요리를 이 김치와 함께 먹으면 간단하지만 훌륭한 식사가 된다. 셋,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을 세 번 봤다는, 아내의 친구 때문이다. 한 번은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또 한 번은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마지막 한 번은 여자 주인공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봤다고 한다. 넷, 강원도 철원의 한국 국경 근처에서 열리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에서 본 관객들 덕분이다. 축제의 둘째 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전혀 자리를 뜨지 않고 전설적인 가수 한영애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은 마치 제례 같았다. 다섯, ‘501 북클럽’ 덕분이다. 한 달에 한 번 비밀결사대 회의에 참석이라도 하듯 주최자의 집에 모여 각자 읽은 책의 신비함을 밝히는 독서 모임이다.
여섯, 해파리의 노래들 덕분이다. 해파리는 두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전자 음악 그룹으로 한국 전통음악이 가진 요소들을 재해석하여 음악을 만든다. 내가 들은 이들의 음악은 유행을 좇거나 비슷비슷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수백 곡의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노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작업으로 보였다. 일곱, 삼성중앙역 근처에 있는 작은 멕시코 식당 ‘비야 게레로(Villa Guerrero)’의 주인이 만드는 타코 덕분이다. 식당 주인인 이정수 씨는 2014년 멕시코 톨루카(Toluca)에서 6개월간 거주하며 현지의 시장 맛집 주방장들과 겨룰 만한 실력이 될 때까지 멕시코 요리를 배웠다. 비야 게레로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입점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저 대가들이 가르쳐준 요리에 경의를 담아 손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데만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여덟, 남산 꼭대기로 오르는 등산로 주변에 촘촘히 박힌 나무들 덕분이다. 이 산속엔 욕심 많고 뚱뚱한 거미와 정신 나간 다람쥐와 워커홀릭 딱따구리가 산다. 아홉, 새로 사귄 예술가 친구들 때문이다. 람한, 김아영, 박혜인. 올해 관람한 이들의 멋진 전시회들은 아직도 나의 꿈에 등장한다. 열, 빵 가게 ‘오월의 종’에서 파는 단팥빵 덕분이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추위를 뚫고 그 가게에까지 가도록 만드는 맛이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