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빈
일러스트레이션 김남복 기자 knb@donga.com
《(버추얼 휴먼)진이에게 막 스무 명의 재능이 쌓일 즈음 22번, 수희의 차례가 온다.
지원자 중 수희만이 걷고, 앉고, 말하는 기초 동작을 공들여 연기한다.
날 때부터 성인의 육체를 타고난 사람이 감정이나 본능을 배제한 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다면. 그때 수희처럼 걸을 것이다.》
3D 영상 제작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는 우영은 버추얼 휴먼 ‘진이 Jin-E’를 만드는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하지만 진이의 파츠 제작에 문제가 생기며, 프로젝트는 난관에 부닥친다. 일반적인 3D 캐릭터와 달리 진이는 오른팔과 속눈썹, 왼쪽 눈이 하나의 레이어에 작업돼 있다. 오른팔을 움직이면 왼쪽 눈이 원래 위치를 벗어나 얼굴 위를 가로지른다. 그 모두가 얼마 전 퇴사한 주형이 저지른 짓이다. 회사 사람들은 주형이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진이를 망친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손도 아니고 어떻게 팔을 눈이랑 합쳐요. 의도가 있는 거지.’
그사이 회사에선 진이의 세밀한 움직임을 연기해줄 배우 오디션이 이뤄진다. 오디션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자리인 동시에, 지원자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아카이브해 진이의 데이터로 쓸 기회이기도 하다. 제대로 확인했는지는 몰라도, 오디션 지원자들이 서명했을 개인정보 제공 동의란엔 아카이빙에 관한 설명이 조그맣게 적혀 있다. 설령 적합한 배우가 없다고 해도 그들의 몸짓은 진이의 피와 살이 될 것이다.
우영은 심사위원 자격으로 오디션에 참여한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대단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작업도 아니지만 지원한 배우들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3번은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8번은 표정 연기가 좋다. 14번은 다른 부분은 별로였지만 진이와 이미지가 적합하다. 진이에게 막 스무 명의 재능이 쌓일 즈음 22번, 수희의 차례가 온다. 지원자 중 수희만이 걷고, 앉고, 말하는 기초 동작을 공들여 연기한다. 날 때부터 성인의 육체를 타고난 사람이 감정이나 본능을 배제한 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다면. 그때 수희처럼 걸을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오디션이 끝난 뒤, 우영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수희를 캐스팅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팀원들은 감정 연기가 탁월하고, 조금이나마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선발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다. 결국 진이를 연기할 배우로 나현이라는 다른 지원자가 낙점된다. 사원들은 나현을 어디서 봤는지, 봤다면 어떤 CF였는지 묻기 바쁘다.
얼마 후 진이의 새로운 파츠가 완성된다. 우영은 진이의 기존 파츠들과 새로 작업 된 파츠들 간의 부조화를 감지한다. 버추얼 휴먼은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에 원래도 각각의 신체 부위를 대칭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의도된 비대칭과는 결이 다른 이질감이 진이의 얼굴에 뚜렷이 드러난다.
“생각해 봐. 해방된 노예들이 처음 뒤돌았을 때, 거기에 정말 동굴 입구가 있었을까? 이미 풀려난 다른 사람이 붙잡혀 있는 이들을 위해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면?”
주형은 그 동굴 안엔 출구도, 해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현의 첫 티저 촬영이 성공리에 마무리된 날, 장 대표는 가벼운 회식 자리를 주최한다. 그는 최근 12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사로부터 받아 기분이 좋은 상태다. 우영은 그곳에서 장 대표가 주형을 고소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하지만 회사 소유의 파일을 삭제하고 간 것도 아닌데 고소가 성립할 리 만무하다. 우영은 주형을 걱정하기보다 그녀가 어떤 회사로 이직했을지 궁금해한다. 이번에도 영상 회사일까? 그곳은 뭘 만드는 곳일까? 그곳 일은 주형이 만족할 만큼 현실과 유리돼 있을까?
티저가 완성된 날로부터 며칠 뒤, 회사에선 각 팀 헤드들의 비상 회의가 소집된다. 진이의 외관이나 영상 퀄리티는 나무랄 데 없다. 쟁점은 진이가 진짜 사람처럼 느껴지느냐다. 우영은 장 대표에게 배우 한 명으로는 진이를 진짜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어렵다며, 더블 캐스팅을 권한다. 마침 나현과 수희는 신체 조건도 비슷하다. 장 대표는 무작위로 다른 참가자들의 영상을 틀어 수희와 비교한다. 장 대표는 저 사람만 꼭 다큐멘터리를 보는 거 같다며 감탄한다.
회사에 새로운 장비가 도착한 날, 우영은 모션 캡처 슈트를 처음으로 입어본다. 같은 팀원인 승규는 테스트를 빌미로 우영의 모습을 촬영한 뒤, 그 위에 진이의 몸을 덧씌운다. 우영은 승규의 장난이 기껍다. 우영은 한순간이나마 진이가 된다. 우영은 진이의 수줍은 미소, 그 너머에 있는 자기 얼굴을 바라본다. 진이는 내가 아니지만, 나이다. 우영은 그 경험에 빠져든다.
한 달 뒤 완성된 첫 티저 결과는 나쁘지 않다. 장 대표의 바람처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몇 있지 않은 버추얼 휴먼답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수희는 그 같은 결과에 크게 관심 없다. 수희는 우영에게 진이의 양쪽 눈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우영만이 알아차렸던 미묘한 이질감을 수희 역시 느낀다. 우영은 충동적으로 수희의 유튜브 채널 이야기를 꺼낸다.
“왜 말을 칼로 찌른 거예요?”
수희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찌른 게 아니라 벤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주를 끝낸 직후, 말은 허벅지 근육이 경직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일본에선 자주 사혈 요법으로 치료하며, 그 행위를 사사하리라고 불렀다. 수희는 ‘니가타에서 슈가와’보다 우영이 보지 않았던 두 번째 영상이 진짜라며, 그것을 꼭 보라고 권한다. 우영은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희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한다. 두 번째 영상의 제목은 ‘공과 나’다. 길이는 다른 영상들과 비슷하다. 우영은 그 영상을 클릭한다. 거친 핸드헬드 영상이 나올 거란 예상과 달리, 조잡한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시작된다. 배경은 서커스다. 좁은 천막에 모인 사람들이 중앙의 원형 무대를 바라본다. 그곳엔 대포나 재주 부리는 원숭이가 아닌, 붉은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공이 있다. 잠시 뒤 젊은 여자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나타난다. 여자는 도움닫기 없이 공 위로 단숨에 올라간다. 우영은 애니메이션의 특이한 화풍에 집중한다. 그 영상은 의심할 것 없이 주형이 만든 것이다.
우영은 수희에게 물은 끝에, 수희가 한때 주형과 같은 대학에 다녔단 사실을 알게 된다. 우영은 주형이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하지만 수희 역시 주형의 근황을 알지 못한다. 수희는 다만 주형이 자기를 모델로 작업했던 캐릭터 스케치를 아직 가지고 있다며, 언젠가 집에 놀러 오라고 권한다. 그 일을 계기로 우영과 수희는 서로의 일상을 차츰 침범한다.
그즈음 회사에선 진이의 파일이 유출됐단 소식이 퍼진다. 유출된 진이는 3D 애니메이션 포르노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있다. 우영은 포르노 속 진이의 수줍은 미소를 본다. 그건 의심할 것 없이 우영이다. 승규가 작업해준 우영 버전의 진이가 포르노에 쓰이고 있다. 우영은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포르노 이슈 이후, 진이의 표정 연기를 담당하던 나현은 계약 연장을 고사한다. 우영은 진이가 누구도 될 수 있는 동시에 누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홀로 남게 된 수희는 꿋꿋이 진이를 연기한다. 수희는 이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곳엔 우영이 없다. 어쩌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우영뿐이다. 수희는 자아가 흔들리는 우영과 달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수희는 우영이 다가올수록 멀어진다. 수희는 프로젝트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한국을 떠날 거란 소식을 끝내 우영에게 전한다.
우영은 수희와의 마지막 술자리를 통해 수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듣는다. 수희는 큰 병을 앓은 직후, 자기가 진짜 살고 싶었던 삶을 찾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브나라는 부인을 만나게 되며,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이어졌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 그것이 수희가 정의한 사랑이다.
우영은 수희가 떠나기 전, 처음으로 수희의 집을 방문한다. 수희의 집에 도착한 우영은 주형이 오래전 그린 스케치를 확인한다. 지금보다 앳된 분위기가 남아 있는 그림 속 수희는 실물보다 아름답다. 수희는 그 그림을 보며 가끔은 단순한 게 더 시선을 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서 채색보다 선화가, 물감보다 연필이, 자연스러운 것보다 어색한 게 좋다.
수희는 오늘 아침 주형에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하며, 언젠가 여행에서 산 조이트로프를 우영에게 선물한다. 우영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조이트로프 속 개를 응시한다. 개는 계속 달리고 있다. 어느 동굴 속 그림자처럼.
○ 당선소감
자기만의 이야기 쓰는 작가들 응원
자기만의 이야기 쓰는 작가들 응원
김혜빈 씨
‘레드볼’은 다른 이름, 다른 얼굴로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얼굴엔 특유의 물성이 존재해, 수술이나 의식적인 표정 변화로도 바꿀 수 없는 고유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 면(面)을 부정하기 위해 복합체로 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내 눈이 아닌, 내 피부와 혀로 이야기를 즐기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새의 전 그런 세상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자주 고민합니다. 결국 여러 모드를 탑재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드는 무엇인가, 이 모드를 내 의도대로 바꿀 수 있는가. 그 질문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작가들. 등단 여부나 지면에 구애 없이, 이 순간에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예비 작가가 아닙니다. 작가입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제가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글이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전부인 R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얼떨떨해하는 저 대신 R은 세 번이나 울어주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글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징그럽지만 그래서 귀여운, 모순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쓰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 보호소에서 버텨준 반려견 B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보냅니다. B, 엄마 상 탔어!
△1994년 광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예술사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 졸업
○ 심사평
서사 구성에 소설 요소 활용능력 돋보여
서사 구성에 소설 요소 활용능력 돋보여
은희경 씨(왼쪽)와 구효서 씨.
돋보인 작품에는 ‘6번들 생수 3800원’도 있다. 반성문과 탄원서를 직업적으로 대필하는 인물들을 통해 글(언어)이 갖는 힘의 양면성을 고민하게 함은 물론, 발화되는 언어가 발화 주체의 의식을 지배하는 딜레마적 상황까지 암시한다. 글이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개연성의 고리를 이어놓음으로써 스릴러적 흥미를 부각하기도 하지만 진행이 다소 단조롭다.
‘홀랜드’는 납득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내쳐 나아가는 기세가 시원하다. 조직적인 문장을 쌓아나감으로써 모종의 구조를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종횡을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돌진한 파흔들로 새롭게 채워지는 소설이다.
‘벽에서 눈이 자란다’도 수작이다. 문장의 어디를 잡고 어떻게 뒤집어 얼마큼 익혀야 제맛을 내는지 아는 작가다. 표현의 레시피에서 관록이 느껴진다. 사람과 삶을 웅숭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건져낼 수 없었을 위트가 펄처럼 반짝인다.
‘샤이닝, 샤이닝 블론드 헤어’에서 느껴지는 입담은 친근하다. 말 그대로 서로 친해 사이가 가까운 사람들을 그린 그림 같고 어쩌면 일기 같고 사진 같다.
구효서·은희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