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소감
‘70매 마감’ 그 마음 기억하며 버텨나갈 것
이를 닦다가 당선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로 나가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중정을 내려다봤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풀밭과 나무가 하얬다. 한때 포근했던 눈은 햇빛에 녹고 달빛에 어는 과정을 반복하며, 사랑이 사그라지면 남는 쓰라림처럼 날카로운 면과 날을 만들고 있었다. 봄이 오면 이 눈의 포근함과 날카로움도 결국 추억으로 남겠지. 창문에 손을 갖다 댔다. 유리는 서릿발처럼 찼다. 아침 기온 영하 12.4도를 기록한 날이었다. 신춘(新春)은 아직 멀었다. 몇 번의 포근함과 날카로움을 더 겪어야 할지 몰랐다. 그 난감함을 버티면 봄은 오는 것이라 믿는다.
신춘문예 당선이 신춘을 앞당기는 건 아니다. 바뀔 것 없는 일상이었다. 1인분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또 고기 1인분도 채 제대로 굽지 못하고 태운 심정으로 퇴근했다. 당선 전화 받을 때 포근해졌던 마음은 빨리 얼어갔다. 당선이 보장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응모작 보낸 날을 기억한다. 공고에 따라 우편봉투에 빨간 펜으로 ‘신춘문예 응모작품’이라고 크게 썼다. 민망해 우체국 직원 눈도 못 마주쳤지만, 그때만큼은 지구의 중력이 조금은 약해진 것 같았다. ‘총 70매 원고를 마감했다’는 마음이 나에겐 당선보다 중요했다. 일상의 자괴(自愧) 속에 그런 자부(自負)는 희소하겠지만, 그 마음을 기억하며 글을 쓰고 마감을 하고 버텨 나가겠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선 소감이라면 마땅히 ‘고맙다’고 써야 맞겠지만, 쉽게 써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줬고, 난 덜 상처받았다. 미안하다. 이 소식을 듣는다면 가장 기뻐했을, 그러나 소식을 전할 수 없는 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다.
△1984년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 심사평
‘신체성의 회복’ 화두로 면밀한 추적 돋보여
질적으로는 우수한 평문들이 많았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분석한 ‘시간의 주술과 결박된 인간’에서 평자는 이 작품이 한국 영화에서 오컬트 열풍의 정점에 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주요 작품들을 토대로 작가의 철학적 질문들을 탐색한 평문도 흥미로웠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분석한 글은 여러 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참을 수 없는 미저리 되기’라는 글은 해석의 참신성을 보여줬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분석한 글도 여러 편이었는데 그중 ‘폐허를 서성일 것인가, 잔해를 수습할 것인가’라는 글이 단연 돋보였다. 이 글에서 평자는 ‘신체성의 회복’이라는 화두로 3시간에 이르는 작품의 텍스트를 대단히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체호프의 연극은 수어(手語)까지 포함하는 다국적 언어로 수행되고 있는데, 극 중 연출가인 주인공 가후쿠가 앉은 자세로 프레임에 갇혀 있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차츰 행위 주체자로 변화해 간다는 것이 평자의 분석이다.
평자는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 시기를 기타노 다케시, 구로사와 기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와세 나오미 4인방이 주도했다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영화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고 그 중심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있다는 것이다. 헤이세이적 인물들이 시대의 불안과 허무 속에 행동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면, 류스케의 인물들은 신체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다시 일어서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평자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포스트 헤이세이 일본 영화의 새로운 서막을 열고 있다고 본다.
김시무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