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종이에 굵은 선으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 붓의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담백한 그림이다.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에 낯선 경쾌함을 주는 건 가운데에 적힌 삐뚤빼뚤한 글씨다.
MIRIM SUH, Untitled, 2019, 리만머핀 제공
“할아버지 사랑해요. Happy Birthday! 서미림 올림.”
여기서 말하는 ‘할아버지’는 한국 수묵 추상의 대가 고 서세옥 화백(1929~2020)이다. 서 화백을 기리는 전시에 등장한 이 그림 ‘무제’(2019년)의 작가는 서 화백의 손녀 서미림이다.
전시의 중심에는 서 화백이 있다. 서 화백의 작품은 수묵화와 드로잉 7점. ‘자화상’(1970~1980년대)에서는 다양한 먹의 농담과 두께를 시도했던 서 화백의 노련함을 살펴볼 수 있다.
SUH SE OK, Self-Portrait, 1970s–80s, 리만머핀 제공
그의 대표작 ‘People‘(사람들) 시리즈는 극도로 단순화된 몇 개의 선만으로도 살아 있는 듯한 역동성을 보여주는 화업(畵業)의 정수다. 서 화백의 아들인 국내 대표 설치예술가 서도호와 건축가 서을호의 작품 또한 전시장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SUH SE OK, People, 1995, 리만머핀 제공
재미는 서 화백 가족의 몫이다. 특히 흥미로운 건 서 화백의 자취가 3세대 가족 구성원에게까지 녹아있다는 점이다.
손녀 서오미의 ‘Piggybacks’(2018년)는 동그라미와 직선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인데, 제목에서 유추하건대 사람들이 서로를 등에 업은 장면을 표현한 그림이다. 할아버지 서 화백의 추상미와 아버지 서도호의 작품에서 주로 드러나는 유기성이 엿보인다.
OMI SUH, Piggybacks, 2018, 리만머핀 제공
손녀 서미림의 종이 설치작품 ‘Suh People’(2018년) 또한 서 화백의 ‘사람들’이 화면에서 튀어나와 서로 얽혀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SUH MIRIM, Suh People(인간관계), 2018, 리만머핀 제공
드로잉,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이 가족 구성원들의 작품은 각각 특색이 있지만 ‘가장 귀한 존재는 사람’이라는 서 화백의 철학이 바탕에 있다. 색다른 방식으로 예술가를 추념하는 전시인 셈이다.
리만머핀 측은 “서로 다른 세대의 가족 구성원이 협력해 합작한 이 작업은 서 화백의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접근이 3세대에 걸쳐 전승된 것을 기리는 찬가”라며 “서 화백이 평생 고민해온 주제인 ‘시공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연결성’에 대한 현 세대의 답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내년 1월 20일까지.
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