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로이드사는 60초 안에 흑인을 가둔다.”
1970년 10월 4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폴라로이드사. 경영진이 드나드는 주차장과 출입문은 물론이고 회사 게시판과 화장실 곳곳에 이 같은 문구가 적힌 전단지가 나붙었다.
전단을 붙인 이는 폴라로이드 컬러사진연구소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 화학자 캐럴라인 헌터였다. 그는 며칠 전 회사 실험실 문 옆에 붙은 게시판에서 흑인을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아래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광부’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60초 안에 즉석 사진을 뽑아내는 신기술이 남아공에서는 흑인을 차별하는 ‘유색인종 통행증’을 만드는 데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단지를 뿌리며 회사에 맞선 캐럴라인은 결국 해고됐지만 7년간의 싸움 끝에 폴라로이드사는 남아공에서 철수했다. 즉석사진 한 장이 흑인들을 차별 속에 가뒀지만, 이런 현실을 바꾼 건 사람이었다.
미국의 흑인 여성 과학자인 아이니라 라미레즈 전 예일대 재료과학부 부교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이미 과학 세계로 들어서는 입학허가증을 이미 가진 것”이라며 “그 길은 쉽지 않고 많은 장벽이 있지만 과학은 백인 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저자 홈페이지 사진.
고작 폴라로이드와 같은 기술 장치가 세상을 바꾼다면 인공지능(AI)이나 인터넷은 어떨까. 흑인 소녀였던 아이니사 라미레즈 전 예일대 재료과학부 부교수(54)는 어린 시절 캐럴라인을 보며 과학의 윤리를 가슴속에 새겼다. 지난해 11월 30일 신간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김영사)을 펴낸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된 과학기술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며 “즉석사진이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지탱하는 도구로 쓰였듯 우리가 개발하는 기술은 무해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라미레즈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젊은 혁신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책에서 시계, 카메라, 전신 등 다양한 과학기술 발명사를 조명한 그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인간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 일례로 저자는 1927년 미국의 발명가 워런 매리슨(1896~1980)이 최초로 만든 전자식 ‘쿼츠 시계’가 불러온 변화에 주목했다. 신기술로 값싼 손목시계가 대량생산되자 일상의 순간들이 시간과 분, 초 단위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시간표’, ‘하프타임’, ‘타임아웃’과 같은 신조어도 이때 생겼다. 그는 “작은 손목시계 하나가 세상을 바꿨다”며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과학기술이 급변하는 요즘 우리는 과학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쉽게 예측조차 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특히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잘못된 점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내 손 안에 든 인터넷 세상에서 잘못된 정보가 움직이는 속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학기술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힘도 우리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과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여론을 모으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요즘 같은 ‘과학기술 황금시대’에 과학기술을 둘러싼 윤리적 토론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다.
“과학기술을 바로잡기 위해서 단순한 소비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 영리하고 용감한 시민이 돼야 합니다. 저의 책이 우리 주변의 기술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새로운 렌즈가 되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