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잠깐 논문 좀 쓰고 올게요”… 연간 10일 ‘학습휴가’ 도입될까

입력 | 2023-01-05 03:00:00

내년부터 의무화 법령 개정 추진
기업들 “비용 늘어날 것” 우려… 시행 기업 “생산성 향상 효과”
평생학습은 선택 아닌 필수사항
도입 이전에 인식 개선 선행돼야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남모 씨(33)는 지난해 3월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15일짜리 휴가를 썼다. 직장에 다니면서 틈틈이 논문 준비를 했지만 집중해서 마감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쓴 휴가는 개인 연차휴가가 아니라 회사가 매년 15일씩 제공하는 ‘학습휴가’였다.

남 씨는 “한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10년 전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실제 업무에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회사가 학습휴가를 지원하는 등 자기 계발을 장려하는 분위기여서 대학원 공부를 통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정부, 학습휴가 보장 추진… 기업 일부는 “부담”

지난해 말 교육부가 발표한 ‘제5차 평생교육진흥 기본계획(2023∼2027년)’에는 이 같은 ‘학습휴가’를 법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매년 열흘씩 학습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하고, ‘평생학습 휴직제’ 도입도 검토한다는 내용이다.

경제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평생학습 의지가 강한 3050세대의 자기 개발을 돕기 위해서다. 2021년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직장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0대의 85.4%가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30대는 80.7%, 50대는 74.9%였다.

지금도 ‘평생교육법’에 따라 직장인이 학습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현행법에는 ‘유급 또는 무급의 학습휴가를 실시하거나, 도서비, 교육비, 연구비 등 학습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만 명시됐다. 학습휴가를 부여할지는 소속 기관 대표의 재량에 달려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학습휴가 제도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 서울의 한 IT 기업 대표는 “매년 10일씩 학습휴가가 생기면 직원들 휴가 기간이 거의 2배로 늘어난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업무 공백, 대체 인력 확보에 들어가는 비용 증가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시행 기업들 “업무 생산성-회사 충성도 높아져”
이미 학습휴가를 도입한 곳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의견도 나온다. 직원 역량이 올라가고,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져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는 2005년부터 학습휴가제를 도입했다. 3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매년 15일의 유급 학습휴가를 쓸 수 있다. 약 150명의 직원 중 매년 100명가량이 학습휴가를 사용한다. 오재철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 대표는 “학습휴가를 앞둔 직원들은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사내 복지에 만족하는 직원들의 근속 연수가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학습휴가를 활용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이 회사 직원 박성진 씨(41)는 “6년 동안 학습휴가를 활용해 1종 대형 운전면허도 따고, 동해안에서 서핑도 배웠다. 짧은 휴가로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성취하고 나니 회사 업무에도 더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 佛은 최대 1년-獨은 대부분 1주일 보장
해외에서는 노동자의 권리로 학습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1974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유급 학습휴가에 관한 조약과 권고’를 채택하면서 학습휴가 도입 국가가 늘었다. 프랑스는 1984년 개인 훈련휴가 제도가 생겼다. 휴가 기간은 훈련 형태에 따라 최대 1년까지 가능하다. 독일은 주(州)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주일의 학습휴가를 쓸 수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법령 개정을 추진해 평생학습휴가를 의무화할 계획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2020년 고용노동부의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30.1%가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연차휴가뿐 아니라 남성 육아휴직, 돌봄휴가 등 보편적인 쉴 권리가 아직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학습휴가 도입은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평생교육에 대한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학습휴가 제도가 정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민승 한국평생교육학회장은 “‘학교를 졸업하면 학습도 끝난다’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직업적 성취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도 평생학습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창기 전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등 사회가 급변하면서 평생학습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정부가 학습휴가를 적극 시행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 지원을 강화해야 제도가 연착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