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해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총사령부 총사령관(오른쪽 사진 왼쪽)을 만나 포즈를 취한 히로히토 천황. 편안한 자세의 맥아더와 긴장한 듯한 천황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동아일보DB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45년 8월 15일 정오, 사상 처음으로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옥구슬 같은 목소리(玉音放送)’는 아니었다.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적군이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자꾸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있으니, 참화가 어디에 미칠지 실로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수십만 명이 즉사했으니 ‘잔학한 폭탄’인 것은 맞지만 히로히토,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역사상 최초 외국군 日 본토 점령
히로히토는 “앞으로 제국이 맞게 될 고난은 분명 심각할 것”이라며 “격정에 사로잡혀 함부로 일을 일으키거나 동포끼리 배척하고 시국을 어지럽혀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 대하여 신의를 잃을 것”을 경고했다(유인선 외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중 일본근현대 편). 내가 ‘결단’을 내려 전쟁을 끝냈으니 앞으로도 내 말을 잘 따르라는 말투다.
그러나 그런 허세와는 달리 히로히토와 천황제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이미 이승에 없었으니, 히로히토도 그리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1500년 계속돼 온 천황제 자체가 폐지되든가, 천황제는 유지하되 히로히토를 처벌 혹은 처형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히로히토 퇴위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였다.
역사상 두 번째, 그리고 700년 만에 경험하는 외국군이 맥아더 군대였으니 일본인들의 충격을 짐작할 만하다. 외국군에 점령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전쟁은 끝난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변경이 아니라 수도, 즉 천황이 있는 곳에 외국군이 진주했고, 천황과 일본의 운명이 그들 손에 있었다.
일본은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길을 선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창 들고 “미국 놈들 때려죽이자”던 국민들은 맥아더를 칭송하는 수십만 통의 편지를 전국 각지에서 보냈다. 한 시골 노인은 “옛날에는 천황 사진을 놓고 아침마다 경배했지만 지금은 장군님 사진을 놓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내, 맥아더를 흐뭇하게 했다. 끊이지 않던 ‘지사(志士)’들의 테러도 온데간데없이 사려졌고, 그 ‘용맹’하다던 ‘황군(皇軍)’은 점령군에게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의회는 유지되었지만, 사실상의 ‘일본 총독’ 맥아더가 그 후 6년간 일본을 좌지우지했다. 그것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맥아더-천황, 사뭇 다른 촬영 자세
미국은 독일을 직접 통치한 데 비해 일본에는 간접 통치를 택했다. 일본 정부와 의회를 해체시키지 않고, 그들을 통해 점령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예상보다 일본이 훨씬 빨리 항복해서 점령 준비를 미처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은 주일 미국대사관으로 맥아더를 예방했다. 히로히토의 부동자세와 맥아더의 건방진(?) 포즈가 대조적이다. 이에 당황한 당시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는 언론사에 게재 금지를 명령했지만, 그 따위 명령이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진에 나타난 천황의 초라한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둘 사이의 권력 관계는 명백했다.
日 진보 열망 개혁 이룬 미군정
1946년 일본 이치카와에서 열린 극동연합군 군사재판소 대법정 피고인석에 출석한 일본인 전범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