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지난해 9월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함께 카자흐스탄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GT
이런 카자흐스탄은 18세기부터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다 1936년 소련에 편입됐고, 1991년 옛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2019년까지 친러시아 성향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29년간 철권통치했다. 또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을 옛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후계자인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지난해 1월 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사상 최대 반정부 시위가 유혈사태로 비화하면서 정권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토카예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최정예 공수부대를 카자흐스탄에 급파해 유혈사태를 수습하는 데 도움을 줬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철저한 ‘거리두기’
러시아는 이처럼 지금까지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옛 소련에 속했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뒷마당’인 중앙아시아 5개국을 ‘관리’해왔다. 이들 5개국도 그동안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러시아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5개국의 ‘주종(主從)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러시아는 1년 전만 해도 중국의 진출에도 중앙아시아 5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5개국은 러시아에 대해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5개국 은행이 러시아의 미르 카드 결제를 중단한 것이 대표적인 거리두기 사례다.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제재로 국제결제시스템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됐다. 이에 따라 세계 3대 카드사인 비자와 마스터카드, 아멕스는 지난해 3월 6일부터 러시아에 대한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러자 러시아 중앙은행은 2015년 자체적으로 만든 국가지불카드시스템(NSPK)인 미르 카드를 통용해왔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 5개국 은행이 미르 카드 결제를 중단한 것은 서방을 지지하거나 러시아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자국 국익을 위해서다. 이들 5개국이 서방의 제재 조치를 따르지 않을 경우 경제가 붕괴하거나 고립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어느 때보다 그들을 필요로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과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이 지난해 10월 독립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실
에모말리 라흐몬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된 9개국이 결성한 정치공동체)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리도 존중받고 싶다”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과거 소련처럼 대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정치 분석가 루스탐 부르나셰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영향력이 약화하는 러시아에 불만을 표시하고 평등한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러시아가 이제는 ‘큰 형님’ 역할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러시아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3자 천연가스 연맹’ 결성을 제의했지만 냉담한 반응에 직면해야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주요 고객이던 유럽이 자국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줄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런 구상에 대해 주라벡 미르자마흐무도프 우즈베키스탄 에너지장관은 “러시아와의 가스 협력은 상업·판매 계약으로만 성사될 수 있다”며 “우리는 절대 가스를 대가로 정치적 상황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로만 바실렌코 카자흐스탄 외무차관도 “3자 천연가스연맹 결성은 현재까지는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의 제안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는 자칫하면 서방 제재로 자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국익에 손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무르 우마로프 미국 카네기국제평화기금 연구원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가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며 “이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노선 변화 기조에 따라 미국을 비롯해 유럽 각국과 일본 등은 5개국과 관계 강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은 이들 5개국을 방문해 각종 지원을 약속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고위대표도 지난해 11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협력 강화를 다짐했다. EU는 카자흐스탄을 새로운 에너지 공급처로 삼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도 지난해 12월 24일 도쿄에서 중앙아시아 5개국 외교장관들과 회담을 열고 식량·에너지·물류 공급망 확보와 인적 교류를 통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훔치고 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인 바커투 통상구에 중국 대형 트럭들이 대기하고 있다. GT
중국은 무엇보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더욱 강화하는 등 중앙아시아 5개국과 경제협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올해 자국의 신장웨이우월(위구르)자치구 카스에서 키르기스스탄 카라수를 거쳐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을 잇는 총길이 577㎞의 CKU 철도 건설에 나설 예정이다. 이 철도는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유럽으로 가는 노선으로, 3국은 1997년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하고 철도 연결을 추진해왔지만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러시아 측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열린 CSTO(옛 소련에 속했다 독립한 국가들의 집단안보조약기구) 회의 당시 푸틴 대통령에게 CKU 철도 건설 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푸틴 대통령도 더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72호에 실렸습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