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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야파 방문[임용한의 전쟁사]〈246〉

입력 | 2023-01-10 03:00:00


지중해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야파는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중요한 항구이자 군사 거점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때도 야파는 격전지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야파 요새를 함락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고, 그 대가로 함락된 도시에 대해 무자비한 보복과 약탈을 감행했다.

신의 응징이었을까? 야파의 프랑스군에게 재앙이 닥쳤다. 가래톳페스트(선페스트)가 프랑스 병사를 덮쳤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저하하고,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고민에 빠졌다. 1799년 3월 7일, 절망과 죽음만이 감도는 야파의 페스트 환자 수용소에 나폴레옹이 나타난 것이다. 감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원한과 억한 심정 때문이었을까?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들이 나폴레옹 주변으로 비틀거리며 모여들었고, 누군가는 나폴레옹의 몸에 손을 대거나 옷을 붙잡으려고 했다.

종군 화가 앙투안 장 그로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다 죽어 가는 환자들, 전염이 두려워서 나폴레옹 뒤에 있는 장교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적인 과장이다. 야전병원에서 실제 나폴레옹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할 때 나폴레옹은 페스트 환자들을 살해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1804년 황제 즉위를 앞둔 나폴레옹은 야파의 병문안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주문했다. 자신의 원정 실패를 대중선전으로 메우려는 의도였다. 그의 상징처럼 된 그림,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를 타고 “나를 따르라” 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다비드의 작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도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나폴레옹은 대중선전의 천재였다. 대중의 심리를 읽을 줄 알고, 이런 한 번의 선전전으로 승리에 감동을 더하고, 패전조차도 감동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정치 감각도 나폴레옹을 구하지는 못했다. 선전으로 대중의 눈을 가릴수는 있지만 술수로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