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단독]“아이 수술 6개월내 받아야하는데, 1년 기다리라니…”

입력 | 2023-01-12 03:00:00

[어린이 의료 악화] 소아과 의사 부족… 부모들 발동동
어린이 환자, 국립대병원 진료대기
5년새 9.7→16.5일 2배가까이 늘어




11일 서울의 한 국립대병원 복도 대기실에서 어린아이와 부모들이 소아 외래 진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대기 좌석이 만석인 가운데 아이를 안고 서서 기다리는 남성도 보인다. 최근 수년간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부족해지면서 외래 진료 환자들의 대기 일수도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두 돌이 되기 전에 수술을 해야 한다더라고요. 그럼 고작 6개월 남은 건데, 1년 넘게 기다리라니…. 막막했죠.”

서울에 사는 김모 씨(35)는 아들 이모 군(18개월)을 동네 소아과의원에 데려갔다가 “유아 사시(斜視)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이 필요할 것 같으니 큰 병원에 데려가 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 줬다. 급한 마음에 서울 시내 주요 대학병원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소아안과 담당 교수 예약은 1년 이상 꽉 찬 상황”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이 군처럼 아픈 아이가 대학병원에 진료를 접수시킨 뒤 첫 외래 진료를 받기까지 걸린 기간(진료대기일수)이 5년 만에 70%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실이 전국 국립대병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동아일보가 분석한 결과 전국 15개 주요 국립대병원 소아청소년과의 평균 진료대기일수는 2017년 9.7일에서 지난해 16.5일로 늘었다.

병원계에선 중소 규모 2차 의료기관(종합병원)이 만성적인 의료진 부족과 낮은 수익성을 견디다 못해 소청과 진료량을 줄인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부산대병원 관계자는 “최근 인근 중소병원 중 소청과 진료를 줄이거나 없애는 곳이 늘면서 지역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우리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대병원은 이 기간 소청과 대기일수가 3배(11.6→34.5일)로 늘어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전공의(레지던트) 지원 급감, 전문의(교수) 유출로 진료대기일수가 점점 더 길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아픈 아이 대학병원 진료까지 16일 대기… 5년새 2배 가까이 늘어

소아과 의사 부족
새내기 의사들 “소아과 돈 안돼” 기피
소청과 모집공고 낸 10개 국립대중
서울대 등 3곳 빼고 7곳은 지원자 ‘0’



인천의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은 지난해 말 소아청소년과(소청과) 입원 병동 운영을 올해 2월 말까지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길병원 소청과는 “전공의(레지던트) 정원이 12명인데, 이 중 근무 가능한 의사가 1명밖에 남지 않았다. 도저히 입원 병동을 유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소청과 전공의는 주로 입원 환자를 돌보고, 야간 당직을 서며 응급 환자를 담당한다. 이 때문에 전공의가 부족해지면 입원, 응급환자 진료부터 차질이 생긴다. 최근 강남세브란스병원, 이대목동병원 등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중에서도 소청과 야간, 응급실 진료를 정상적으로 보지 못하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 “돈 안돼” 기피…의사 부족

소청과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새내기 의사들이 기피한다는 점이다. 의대를 갓 졸업하면 1년간 여러 과에서 ‘인턴’을 거친 후 전공과목을 선택해 전공의가 된다. 2018년도까지만 해도 소청과는 정원보다 지원자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후 5년 사이 지원자가 급감했다. 올 상반기(1∼6월) 207명을 뽑는데 33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이번에 소청과 전공의 모집 공고를 낸 전국 국립대병원 10곳 중에서 지원자가 1명이라도 있는 곳은 서울대(10명) 전북대(1명) 충북대(1명) 등 3곳뿐이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소청과학회)는 2년 뒤엔 전국 병원의 소청과 전공의 자리 5곳 중 4곳이 공석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소청과가 인기 없는 이유는 ‘돈 못 버는 과’라는 인식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소청과 전문의의 평균 연봉은 1억875만 원(2020년 기준)이었다. 전체 의사 평균(2억3070만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여기에 초저출산 추세까지 맞물리면서 ‘사양 산업’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소청과라는 과목 자체가 조만간 ‘붕괴’하고 말 것”이란 우려까지 나오는 이유다.
○ 소청과 떠나 요양병원 이직하는 의사들
소청과학회 조사에 따르면 소청과 수련병원의 75%는 이미 부족한 전공의를 대신해 전문의가 야간 당직을 서고 있다. 최영준 고려대 안암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밤을 새우고 나면 최소한의 휴식이 필요하다. 교수가 당직을 서는 날이 늘수록 감당 가능한 외래 환자 수는 줄어든다”고 말했다.

병원들은 소청과 전문의를 지금보다 늘리긴 어렵다고 말한다. 한 비수도권 국립대병원 관계자는 “교수님들이 외래진료 1세션(3시간)당 50여 명의 환자를 보고 있지만, 소청과는 수가(酬價·병원에 지급되는 진료비)가 전 과목에서 최저 수준이라 의사를 더 뽑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소청과 근무를 포기하는 전문의가 늘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소청과 전문의는 “지방 중소병원들에선 격무를 견디다 못해 ‘소청과 전문의’ 타이틀을 버리고 요양병원 등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은 “병원 사정 때문에 아픈 어린이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 전향적인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