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너는 평생 연극배우가 될 수 없겠다’고 스스로 되뇌었습니다.”
배우 유동근(67)은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주로 TV드라마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지난달 개막한 ‘레드’로 30여 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 1980년대 민중극단의 전단지를 붙이며 연극계에 발을 들인 유 씨는 엘칸토 소극장에서 실력을 다지다가 무대를 떠났다. 43년차 배우에게도 오랜만의 연극무대는 적지 않은 부담인 것처럼 보였다.
유동근은 ‘레드’에서 배우 정보석(62)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실존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 역을 연기한다. ‘레드’는 미국 출신 극작가 존 로건의 작품으로 로스코와 가상의 인물인 조수 켄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고집스러운 자의식 탓에 새로운 예술사적 흐름을 거부하는 로스코와 그에게 변화를 종용하는 켄이 벌이는 치열한 논쟁이 주를 이룬다. 200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돼 이듬해 토니상 최우수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예술과 삶, 세대간의 갈등과 이해 등을 밀도 높은 대사와 강렬한 무대 미술로 채운 수작으로 꼽힌다.
베테랑 배우인 그에게도 이번 작품은 “첫 아이를 만난 듯” 새롭고 귀한 경험이라고 했다. 다시 연극 무대에 서게 된 건 2019년 후배 정보석이 출연한 ‘레드’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막상 배역을 받자 후회했다고 한다. 유 씨는 “배우로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본, TV와는 다른 발성 등이 큰 숙제였다”며 “다른 배우들보다 연습을 3주 먼저 시작했고 연극 발성을 되찾고자 선생님을 따로 구하기도 했다“고 했다. 100분짜리 연극의 대본은 A4 용지 62장 분량에 달한다. ”지금도 매 공연마다 실수하는 기분(웃음)”이라고.
대본을 받아든 뒤부터는 “그저 하루 종일 레드를 떠들고 레드에 미쳐 있었다“고 한다. 특히 연극의 1막과 마지막 5막을 장식하는 한 마디 ‘뭐가 보이지?’를 어떻게 표현할지가 고민이 됐다. 그는 “야멸차게 훅 지나가버리는 짤막한 대사에 천재 화가 로스코가 겪은 비극과 깊은 사상을 담아내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며 “공연 전 홀로 캄캄한 무대 위에 서서 ‘오늘 내가 로스코와 접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염원하기도 했다”고 했다.
맡은 배역에 몰입하려고 노력한 탓인지 일상에서도 로스코의 모습이 나온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뭐가 보이지?’를 외친다는 것이다. 공연의 막이 오른지 약 3주가 지난 지금도 집에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대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평소 옷도 비슷하게 차려 입는다. 인터뷰 당시에는 가는 철제 테의 알 큰 안경과 체크무늬 셔츠, 빨간 물감이 묻은 흰 티셔츠를 착용했는데, 연극 속 로스코의 의상과도 느낌이 비슷했다.
유 씨는 남은 배우 인생에서 로스코의 ‘레드’처럼 ‘단순한 예술’을 하고 싶고 했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무수한 의미와 감정을 담아내듯 연기하고 싶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우선 연극이 막을 내릴 때까지는 ‘레드’를 배우는 입장일 뿐”이라며 “몸 안에 깃든 로스코를 ‘소각’시키는 데에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어 “새로운 세대가 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로스코와 달리 젊은 후배들이 무대에서 더 큰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덧붙였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