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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조은아]유럽 의사는 지금 파업 중

입력 | 2023-01-13 03:00:00

팬데믹-고물가에 지친 佛·英 의료진 거리로
韓 정부-의료계 대화 나서 혼란 미리 막아야



조은아 파리 특파원


얼마 전 프랑스 파리 도심에서 놀던 아들이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고 혼비백산해 전화로 구급차를 불렀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구급차 요청이 너무 많아 오래 대기해야 하니 차라리 택시를 타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상황이 너무 급해 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황급히 도착한 병원 응급실은 이미 대기자들로 만원이었다.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의사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고 따졌다가 또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 “다른 의료진이 교대하러 오는 중이니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날 아이는 몇 시간을 더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의사를 만났다. 다행히 머리에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받은 뒤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바짝 긴장한다. 의료진과 구급인력이 부족하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이날 의사들이 파업이라도 벌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런데 이런 아찔한 상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에 이어 새해 초에도 파리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내일을 위한 의사들’이란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우리는 당신을 돌본다. 우리도 돌봐 달라” “건강을 위해 단결한다” 같은 구호를 외쳤다. 프랑수아 브론 프랑스 보건장관은 “보건 시스템이 극도의 어려움에 직면한 지금 (의사들이) 파업하다니 환영할 수 없다”며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영국에서도 지난해 12월 말 응급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구급대원 수천 명이 30년 만에 최대 규모 파업을 벌였다. 영국 최대 공공서비스 노조 유니손 소속 국민보건서비스(NHS) 런던구급서비스지부는 업무를 12시간 중단했다. 응급의료 체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영국 정부는 이달 5일 대응책을 내놨다. 구급 소방 철도 같은 핵심 공공부문 노조가 파업할 때 최소한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고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유럽 선진국 의사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난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피로와 불만이 쌓인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공급망 교란 등이 겹치며 고물가가 지속돼 현재 임금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팬데믹으로 의료진이 겪은 고통은 일반 시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을 것이다. 유럽인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의료진 파업에 대한 비판은 그리 크지 않다. 지난해 12월 여론조사기관 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 ‘간호사 파업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28%뿐이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지금 같은 의료진 파업이 반복되면 받을 수 있는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을 위협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모른다. 유럽은 독감과 코로나19가 동시에 유행하는 ‘트윈데믹’으로 병원은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의료 시스템 붕괴 위기를 빨리 해소해야 하는데 정부와 의료진은 접점을 찾기 힘들어하고 있다.

병원 대기시간이 길어져 불만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한국도 유럽 의사 파업을 남 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의료진은 인력 부족과 낮은 건강보험 수가(酬價)를 하소연한다. 정부는 의료 시스템에 생긴 ‘구멍’을 세밀히 점검해 미리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당국과 의료진은 적극 대화에 나서 사회적 혼란을 피해야 할 것이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