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었다는데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눈 내렸다 하는데 그 향기가 유별나다.
대숲 밖 비스듬히 뻗은 가지, 어느 시골집.
쓸쓸한 초가든 부귀한 고대광실이든,
(道是花來春未, 道是雪來香異. 竹外一枝斜, 野人家. 冷落竹籬茅舍, 富貴玉堂瓊謝. 兩地不同裁, 一般開.)
―‘소군원(昭君怨)·매화(梅花)’ 정역(鄭域·남송 초엽)
매화에 대한 시인의 찬사가 나지막하게 이어진다. 애써 과장하지도 도드라진 특징을 과시하는 법도 없이 조곤조곤 매화의 미덕을 보여준다. 봄이 오기도 전에 홀로 추위를 뚫고 의연히 꽃 피우는 건 범접하지 못할 저만의 끈기 때문일 테다. 온 세상 눈 가득 내린 듯 하얀 천지에 아련히 퍼져나오는 유별난 향기, 아, 매화였구나. 그제야 비로소 눈에 띌 만큼 그 개화는 실로 겸손하다. 그 꽃, 그 향기가 시골집 댓가지 위에 새록새록 피어난다. 뽐내지도 자만하지도 않는 가만가만한 고절(孤節)을 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뿐이랴.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는 저 너그러운 맘씨는 설중군자(雪中君子)의 고아한 기품으로 읽어야겠다.
매화를 노래한 한시에서는 눈과 향기의 비유가 곧잘 동원된다. 노매파(盧梅坡)가 ‘흰 빛깔은 매화가 눈보다 조금 못하고, 향기라면 아무래도 눈이 매화를 못 이기지’라거나(‘눈과 매화’), 왕안석이 ‘멀리서도 매화가 눈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건, 은은하게 전해지는 향기 때문이지’(‘매화’)라 한 것 등이 그런 예다. 한데 시인은 매화의 여러 미덕 중에서 그 공평무사한 개화 모티프에 눈길을 주었으니 독특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소군원’은 송사(宋詞)의 곡조명으로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