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신년 덕담으로 “만선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만선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우리 배가 만선을 했다, 만선을 했다.” 환호하면서 아버지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신다. 가족들은 모두 어판장으로 나간다. 오색의 깃발을 펄렁이면서 우리 배가 입항하고 있다. 뱃전은 찰랑찰랑하다. 고기를 배에 가득 실은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만선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몰려든다. 이때보다 인심이 좋을 때는 없다. 선주는 선주대로, 선장은 선장대로 고기를 몇 마리씩 축하객들에게 넘겨준다. 2, 3일 내로 수협으로부터 어대금을 받는다. 출항 준비를 위해 빌렸던 돈을 갚고, 남는 돈을 아이들 학자금으로 사용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특식을 준비하신다. 어선 선원들도 집으로 불러서 한턱을 낸다. 모두가 싱글벙글 웃는다. 만선이 가져다준 기쁨이다.
만선은 매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동해안의 물때가 바뀌어 어족이 사라지면서 매번 허탕을 쳤다. 선주들은 애가 탄다. 출항 준비를 위해 돈을 빌린다. 만선의 꿈을 꾸고 배를 출항시킨다. 새벽 우리 배가 들어오는 ‘통통통’ 하는 기관 소리에 밝은 표정으로 아버지는 어판장에 나가신다. 이윽고 아버지는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오신다. 오늘도 허탕이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위로하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허탕이다. 배를 달아매고 선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 빚쟁이들이 빌려간 돈을 달라고 한다.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만선의 꿈을 꾸면서 근근이 버텨본다. 따뜻한 봄이 와서 한 번은 만선의 꿈이 이뤄졌지만 몇 년을 더 버티지 못했다. 어른들은 결국 30년을 하던 수산업을 접었다.
상선 선장을 거쳐서 학자의 길을 걸어온 지 20년이 넘었다. 나에게 있어서 만선은 무엇인가? 학자의 길에 만선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있다. 학자들은 연구를 통하여 논문과 칼럼을 발표하면서 업적을 내게 된다. 해마다 작성하는 논문 7, 8편과 각종 칼럼이 차츰차츰 쌓이면서 나의 1년마다의 ‘만선’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바탕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결과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선의 만선은 한도가 있다. 공간이 없으면 더 고기를 실을 수가 없다. 잡았던 고기도 버려야 한다. 학자에게 만선은 끝도 한도 없다. 학자인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더 연구를 할 수 있다. 나의 연구 결과가 업계에 도움이 되는 순간마다 만선의 기쁨은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니 나의 만선은 항상 나의 곁에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그 무게와 부피를 더해 가는 나의 만선은 끝없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 부피는 커진다. 수산업에서는 물밑의 고기를 잡을 수 있을지가 불확실했다면 학자들의 공부 방식은 정해져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집안처럼 실패하는 경우도 없다. 학자로서의 만선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결국 집안 어른들의 수산업을 통한 만선은 학문을 통한 만선으로 변경되어 나에게 이어져 온다. 비록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안정된 만선의 기회를 나는 가지는 셈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