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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모란꽃 닮은 시인들의 느슨한 연대

입력 | 2023-01-14 03:00:00

◇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나희덕 문태준 안도현 이병률 외 지음/168쪽·1만3000원·몰개




“흰 모란꽃 위에 바위를 얹었지요/그 바위가 삭아 주저앉기를 기다리면서요/모란꽃 흰 접시는 천년이 지나도록 깨지지 않았어요…”

안도현 시인의 신작 시 ‘모란꽃’이다. 모란꽃의 ‘흰 접시’가 깨지지 않고 천년을 버티듯, 시도 깨지지 않고 버티며 스스로를 지킨다. 모란꽃처럼 오랜 시간을 버텨낸 ‘시힘’의 동인들이 열한 번째 동인지를 펴냈다. 창단 40주년인 2024년을 앞두고 신작 시와 산문을 내놓은 것이다.

1984년 고운기 시인(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제안으로 모인 ‘시힘’의 20대 시인들은 어느덧 시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았다. 안 시인을 비롯해 나희덕, 문태준, 이병률 시인 등 16명의 글을 묶었다.

시인들은 시집에 실린 ‘시힘의 말’에서 “멀리 지내며 서로의 빛을 읽는다”고 고백한다. 느슨하고 넓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 미약하게 연결돼 있지만, 그래서 더 반짝일 수 있다는 것. 이 같은 철학은 1985년 나온 첫 동인지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의 서문 “건강한 삶과 시의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각각의 목소리를 지니며 조화를 이루고 존중할 것”에서도 드러난다.

안 시인은 산문 ‘자유롭고 독자적인’에서 “민중문학의 시대, 시힘의 전투력은 허약했지만 그 덕분에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말한다. 느슨한 울타리가 동인이 문단계의 ‘모란꽃’이 된 비결이라는 것이다.

삶을 “잠깐 거닐다 가는 잰걸음 길 정도”로 비유한 박철 시인의 ‘조약돌’을 읽고 나면 잔잔한 슬픔과 함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정일근 시인의 시 ‘수국塚수국塚’에도 인생의 무상함이 짙게 배어 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공감한다는 건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씻는 것과 같다.” 시인을 썩은 감정을 씻어내 주는 ‘감정 수선사’라 명명한 이대흠 시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