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나경원 전 의원이 16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만찬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요.”
2020년 12월 어느 날. 서울 광화문 인근 음식점에서 만난 나경원 전 의원은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여부를 묻는 말에 “고민하고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출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출마를 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021년 1월 13일 나 전 의원은 “독한 결심과 섬세한 정책으로 서울을 재건축하겠다”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 전 의원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기후환경대사직에서 해임된 뒤 당 주류인 친윤(친윤석열) 진영과 갈등을 빚고 있다.
그는 17일 자신의 해임과 관련해 “대통령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시기까지 저의 부족도 있었겠지만 전달 과정의 왜곡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기에 해임이 대통령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을 에워싸서 눈과 귀를 가리는 여당 지도부는 결국 대통령과 대통령 지지 세력을 서로 멀어지게 할 것”이라며 “내년 총선 승리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윤석열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실이 반박에 나섰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다. 오랜 공직생활을 통해 공적 의사결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또한 여당 초선 의원들도 “말로는 대통령을 위한다면서 대통령을 무능한 리더라고 모욕하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위선이며 대한민국에서 추방돼야 할 정치적 사기 행위”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나 전 의원은 이처럼 대통령실의 반박과 친윤계의 압박이 예상외로 거세지자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강조했던 그는 출마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고심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오른쪽)과 장제원 의원이 지난해 12월 26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부산혁신포럼 2기 출범식에 참석해 악수하며 인사하고 있다. 부산=뉴시스
실제 그는 ‘반윤(반윤석열) 프레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윤 핵심인 장제원 의원은 13일 “오로지 자기 정치만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장 대통령을 위하는 것처럼 고고한 척하는 행태는 친윤을 위장한 비겁한 반윤”이라며 “허구한 날 윤핵관(윤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윤핵관하는 (전 의원) 유승민, (전 당대표) 이준석과 뭐가 다른가. 대통령을 위하는 척하며 반윤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나 전 의원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는 15일 “‘제2의 진박(진짜 박근혜) 감별사’가 쥐락펴락하는 당이 과연 총선을 이기고 윤석열 정부를 지킬 수 있겠느냐. 2016년 악몽이 떠오른다”고 밝혔다. 장 의원이 이번 전당대회와 차기 총선에서 ‘친윤’과 ‘반윤’을 구분 짓는 감별사로 나서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16일 “배제하는 친윤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반윤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 일각에선 ‘친윤 대 반윤’ 프레임 전쟁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친윤계가 나 전 의원을 향해 반윤 프레임 공세를 펼칠수록 그의 정치적 입지가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반윤 프레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족한 당내 세력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쟁자인 김 의원은 당 주류인 친윤 진영의 지지를 받으며 현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세 결집에 나서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나 전 의원은 “중립을 지켜 달라”라며 읍소 전략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친윤 진영 편에 서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말아 달라는 얘기다.
나 전 의원으로선 친윤 진영의 지지를 받은 김 의원의 대세론을 차단하는 동시에 기존 지지층과 함께 비윤(비윤석열) 표심까지 공략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전당대회 구도가 김 의원을 비롯한 친윤 진영과 나 전 의원을 포함한 수도권 연대로 재편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각각 경기도와 인천에 지역구가 있는 안철수 의원과 윤상현 의원이 ‘수도권 대표론’을 강조하는 가운데 나 전 의원도 서울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아울러 결선투표제가 나 전 의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결선투표에서 친윤 진영에서 지원하는 김 의원과 나 전 의원이 맞대결을 펼칠 경우 당원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수도권 후보인 나 전 의원에게 표가 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왼쪽)과 나경원 전 의원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서울시당 신년 인사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이와 관련해 김 의원과 나 전 의원, 안 의원의 3파전 양상으로 흐르는 전당대회 구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결선투표에서 비윤 및 수도권 표심이 나 전 의원 등으로 뭉칠 경우 ‘표 몰아주기’가 당락을 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친윤계의 표 결집을 통해 비윤계 후보의 당선도 막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평가받던 결선투표제가 오히려 친윤 대표 선출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선투표제는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후보끼리 한 번 더 겨뤄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이번 전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결선투표는 3월 8일 본경선에서 50% 이상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9일 양자토론회를 진행한 뒤 10일과 11일 이틀간 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정치권 인사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투표할 수 있는 책임당원은 80만 명가량으로 예상되지만 지역별 각 당협위원회에서 표심을 움직일 수 있는 당원은 현실적으로 500명 정도에 불과하다”며 “20대와 30대, 40대의 당원들도 늘어난 가운데 내년 총선 승리를 바라는 당원들이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승리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나 전 의원과 대통령실의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수도권 대표론을 내세우는 안 의원과 윤 의원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갈등을 계기로 나 전 의원에 대한 지지층 일부가 빠져나갈 경우 나 전 의원과 거리 두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당 안팎에선 나 전 의원이 지지도가 하락할 경우 출마 자체를 안 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조만간 출마를 선언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출마 시점은 윤 대통령이 귀국하는 21일 이후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