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보세요. 아직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아직 이렇게 예쁘잖아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데 호스피스요? 저는 그렇게는 못 해요.” 말기암 환자인 아내를 둔 중년의 남성 중에는 이렇게 매달리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아내와의 이별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기에는 아마도 내가 모르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사연이 있다.
대부분은 안타까운 사연들이고 많은 경우 자신의 잘못과 관련된 사연들이다. 젊어서 바람을 피우고, 사업이 잘 안 될 때 처가의 돈을 꾸어 쓰고, 비즈니스 인맥이라며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밤새 술 마시고, 아이들 학교 문제가 생길 때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고집을 부리고, 아내와 시댁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이러저러하다’며 공정한 척하고.
연애할 때와는 다른 결혼 생활이 지속되며 그 ‘다름’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아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고,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오누이처럼, 때로는 원수처럼 살아온 세월들. 그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흘러가 버린 시간만큼 예전의 가녀리고 예뻤던 여인은 오간 데 없고 우악스럽고 억척스러운 중년 여성이 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암에 걸려 몸져누웠으며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간 아내가 해왔던 집안일, 집안 대소사 챙기는 일, 아이들 챙기는 일을 직접 해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야 보이는 모양이다.
이제 살 만해졌고 이제 정신을 좀 차렸는데 아내가 아프다. 말기암으로 이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 와서 보니 아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고들 한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냥 중년의 여성인데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은 시간이 없으면 안 된다고 방법을 찾아달라고 애원한다.
젊었을 때는 젊었기에 젊음을 모르고 늙어서는 젊음을 잊어서 젊음을 모른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지나가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임을 알려준다. 이 뒤늦은 사랑과 뒤늦은 철듦을 어떻게 해야 할까.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