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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학문’ 생길 정도로 인정받는 건 남편이 남의 흉내 안 냈기 때문”

입력 | 2023-01-20 03:00:00

김현경 여사가 말하는 ‘남편 金시인’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

김수영 시인(1921∼1968·사진)이 1960년대 쓴 에세이 ‘토끼’의 일부다. 글에 등장하는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96)를 19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토끼띠로 올해 96세인 고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18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토끼 모양 장식물을 앞에 둔 채 웃고 있다. 김 여사는 “(김 시인은) 진짜 알맹이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용인=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 시인과는) 동네 아저씨의 친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행색이 아주 기괴했어요. 눈은 부리부리하고. 제가 힘들던 시절 ‘같이 문학 하자, 너 재주 있다’며 만나기 시작했죠.”

81년 전 일이지만 김 여사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1942년 김 시인과 사귀던 당시에 대해 김 여사는 “김 시인이 우리 집 담벼락에 와 휘파람으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불면 제가 ‘너 왔구나’ 하고 나가 데이트했다”고 했다.

김 시인은 자신의 시에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서로 써온 시를 바꿔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인이 ‘똑같은 시는 쓰면 안 된다’며 가져온 종이를 찢더라고요. 당시 시인이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발표한 시 ‘묘정의 노래’를 읽고 조지훈 시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말이죠.”

김 시인의 1949년 작품 ‘토끼’는 이렇게 시작한다.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토끼는 태어날 때부터/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김 여사는 “여동생이 우리 신혼집을 찾아와 ‘친정에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내가 토끼띠라는 걸 알던 김 시인이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며 “(김 시인은) 토끼같이 날 예뻐했다”고 했다.

김 시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세는 기울고 병치레로 고생하다 김 여사를 만났다. 1950년 결혼 직후 6·25전쟁이 터졌다. 김 시인은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광복 후 ‘폭포’ ‘푸른 하늘을’ 등 강렬한 현실의식을 담은 시를 쏟아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968년 그가 ‘토끼같이 예뻐했던’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숨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요즘도 김 시인의 작품이 많이 연구되는 데 대해 김 여사는 “남의 흉내를 안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벌레인데,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늘 본질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쓰고 차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머물지 않고 늘 앞서가는 자유정신으로 펜을 잡았어요.”

김 여사는 눈이 그렁그렁한 채 말을 이어갔다.

“요즘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일과가 김 시인의 책을 읽는 거예요. ‘김수영 학문’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히고 인정받는데,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싶어요.”

용인=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