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은막(銀幕)의 여왕’ 윤정희(79·손미자)의 별세 소식에 그녀의 남편이자 ‘건반 위의 구도자’로 통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77)와 영화 같은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두 살 차이 연상연하’ 커플인 두 사람을 처음 만나게 해준 이는 ‘심청’이다.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의 세계 초연을 각각 보러 갔다가 만났다. 윤정희는 당시 뮌헨올림픽 문화축전에 자신이 주연한 영화 ‘효녀 심청’(감독 신상옥)이 상영되면서 현지에 갔고, 백건우는 ‘심청’의 초연을 관람하기 위해 뮌헨을 찾았다.
당시엔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윤정희는 톱배우였지만 백건우는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 살며 음악 공부에 몰두했던 터라 그녀의 유명세를 알지 못했다. 백건우는 당시 막 떠오르는 연주자였다. 그러다 윤정희가 현지에 유학왔고 1974년 백건우가 파리에 정착한 뒤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다. 영화, 음악 등 예술이 공통점이 돼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1976년 파리에서 결혼했다.
결혼 이듬해인 1977년 7월 이들 부부의 납북(拉北)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 부호의 연주회 초청을 받고 당시 유고슬로비아에 들어갔다, 납치되기 직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두 부부는 항상 함께 했다. 윤정희는 연기 활동보다 피아니스트 아내로서 내조 역할에 더 충실했다. 연주회나 간담회 자리뿐 아니라 모든 자리에 함께 했다. 2016년 7월 뇌졸중을 이겼으나 언어 능력을 잃은 김승옥의 수채화 전시에도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11월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주최로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윤정희가 공로영화인상을 받을 때도 함께 했다.
그런데 2019년 3월 백건우가 유니버설뮤직 그룹 산하 클래식음악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을 통해 발매한 ‘쇼팽: 녹턴 전집’ 간담회에서 윤정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부터 병세가 조금씩 악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윤정희가 10년 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같은 해 5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요양 중이었다. 이들 부부의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가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정희는 2017년 알츠하이머 병을 진단 받았다.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 영화 ‘시’(감독 이창동)다. 홀로 손자를 키우며 늦은 나이에 시를 배우는 할머니 ‘미자’를 연기했다.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 그녀가 나왔다. 이 영화로 국내 영화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고, LA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2011년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 dans l‘ordre des Arts et Lettres)도 수훈했다.
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겪는 역이었다. 이창동 감독이 처음부터 윤정희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 알려졌다. 미자라는 이름은 윤정희의 본명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