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조금 지난 2022년 7월. 갓 취임한 사정기관 고위 당국자가 사석에서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도록 한 문재인 정부 시절 국회 입법은 국가안보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취지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하라고 했으니 따라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국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직접 내려 보내는) 직파간첩은 없습니다. 해외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인데 그건 해외 정보기관들과의 협조가 되어야 파악이 됩니다. 경찰은 그거 절대 못 잡습니다.”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스파이 작전도 글로벌화 되었기 때문에 ‘북에서 바로 들어오는 간첩을 앉아서 잡는’ 시대는 갔고 그렇기 때문에 간첩 조직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환’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세워진 1961년 중앙정보부 설립 당시의 초대 원훈석. 동아일보DB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해외 정보기관들은 정보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을 수 있고 비밀유지가 되는 상대방과만 거래를 합니다. 그 일을 해 온 것이 한국에서는 국정원입니다. 국정원이 나서도 힘이 부칩니다. 북한은 대남 간첩 요원을 80년 키운다고 합니다. 평생 그 일만 시킨다는 것이죠. 우린 30년을 키워도 대적이 안 될 판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잘리고 또 잘리고….”
당시에는 그 말이 긴급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속속 드러나는 시민단체와 정치권, 노동계 등의 간첩 연루 혐의 소식을 보면 윤 정부 국정원은 출범 초기부터 대공수사권이 왜 국정원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증명해 보이기로 마음 먹은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 김규현 국정원장의 비서실장 산하에 방첩조직을 만들어 간첩 수사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내용들을 보면 국정원의 ‘증명’이 일부 성공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한민국의 제도권 노동운동 조직인 민노총 간부들이 해외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었다는 혐의가 사실이라면 충격적입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점을 마련한 북한 공작 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불러내 접선했다고 합니다. 돈이 오갔고 비밀 교신 수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내에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요인들을 포섭하려 했답니다.
과거 냉전시절의 뻔한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북한의 대남 공작 조직 활동 구조의 변천을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먼저 분단 후 남한에 자생하는 간첩 조직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1975년 불가리아를 방문해 “남조선의 마르크스당인 통혁당은 약 3000명 가량”이라고 실토했음이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입수한 북한 외교문서를 통해 2013년 공개됐습니다.
1975년 당시의 북한 김일성 주석. 동아일보DB
두 번째는 북한 간첩이 남한에 내려와 요인을 만나고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1990년대 유명한 간첩 김동식이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만나 포섭하려 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1996년 기자생활을 서초동 법원에서 시작하면서 법정에 선 김동식을 직접 보았습니다). 유 원장은 “북한은 김대중 정부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직파간첩 투입 방식에 부담을 느끼고 해외에서 간첩을 들여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10년대 들어서는 해외에 거점을 둔 북한 간첩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해외로 불러 포섭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글로벌 화’ 했다는 겁니다.
이번 사건에서 국정원은 상대국인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은 물론 국제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공조 수사를 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정원이나 검찰 등 공안당국이 암시하는 간첩조직의 규모도 상상 이상인 듯합니다. 한 사정당국 인사는 “하마터면 나라 넘어갈 뻔 했다”고 암시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도 동아일보에 “혐의자는 수십, 수백 명 더 늘어날 수도 있다”거나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인사들이 튀어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말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1990년대 이후 남북한의 국력차이가 커지면서 남한 내부에 간첩조직을 키워 전복시키겠다는 북한의 대남전략이 사실상 끝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핵 미사일 능력을 키워오면서 방식을 전환하며 대남 간첩 활동을 계속하는 북한을 보면서 한반도는 아직 분단과 냉전 상태의 지속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왼쪽)와 그의 비서 생 귄터 기욤. 동아일보DB
1927년 동독에서 태어나 1956년 아내와 서독으로 건너 온 그는 동독과의 비밀 교신이 꼬리를 잡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동독 첩보조직 슈타지 소속 인민군 장교였음을 실토했다고 합니다. 그레고어 쇨겐이 쓴 ‘빌리 브란트(김현성 옮김, 빗살무늬, 2003)’에 따르면 조사를 맡았던 ‘기밀조사위원회’ 위원장 테오도르 에쉔부르크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영리하고 조직력이 있으며 명민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어떤 일도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 (총리실에서) 그는 동료들과 부하직원들과 잘 지냈다. 호기심이 가득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공무를 맡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한마디로 기욤이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공직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유동열 박사의 구분에 따르자면 세 번째 유형입니다. 밖에서 들어왔지만 오랫 동안 자리를 잡은 뒤 활동을 한 케이스지요. 최영태 전남대 교수는 ‘빌리브란트와 김대중: 아웃사이더에서 휴머니스트로(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0)’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적 이유를 내걸며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도 서독에서 장기간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대공당국의 관심이 없어질 즈음 애초에 의도했던 임무를 수행하는, 소위 장기전을 펴는 간첩들이 있었다. 기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었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 중에는 동독 정치범의 석방기회를 활용하여 서쪽으로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서독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