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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21세기 판 아편전쟁’, ‘죽음의 마약’ 펜타닐로 격화

입력 | 2023-01-22 13:04:00

멕시코 마약조직과 중국 화학업체 결탁… 中 “왜 남 탓 하느냐”




펜타닐은 중국(원료)에서 멕시코(제조·밀매)를 거쳐 미국(소비)으로 들어간다. [THE WIRE CHINA]

멕시코 북서부 시날로아주 주도 쿨리아칸은 세계 최대 마약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근거지다. ‘엘 차포’(El Chapo·땅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이 1988년 만든 시날로아 카르텔은 멕시코 31개 주 가운데 17개 주, 전 세계 50여 개국에 지부와 조직원을 두고 있다. 이 조직은 구스만의 성을 따 ‘구스만 카르텔’ 혹은 ‘태평양 카르텔’로도 불린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시날로아 카르텔을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 밀매 조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조직은 코카인, 헤로인, 메스암페타민(필로폰), 마리화나, MDMA(엑스터시), 펜타닐 등 각종 마약을 제조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불법적으로 공급한다.


멕시코 시날로아 카르텔이 펜타닐 주요 공급처

멕시코 국가방위대와 시날로아 카르텔 조직원들이 벌인 시가전으로 트럭 등이 불타고 있다. [REFORMA]

구스만은 2017년 범죄조직 운영, 마약 밀매, 돈세탁 혐의 등으로 멕시코에서 체포돼 미국으로 인도된 후 2019년 보석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후 시날로아 카르텔은 엘 차포의 아들 오비디오 구스만(33)이 형제들과 함께 이끌어왔다. 미국 연방 검찰은 2017년 오비디오를 코카인, 메스암페타민 등 마약 밀매 혐의로 기소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멕시코 정부에 그를 체포해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미국 국토안보부는 2021년 12월 그의 목에 현상금 500만 달러(약 62억 원)를 내걸었다.

멕시코 정부는 1월 5일 쿨리아칸에 은신해온 오비디오를 검거하기 위해 국가방위대와 군 병력 900여 명을 동원해 전격적으로 체포 작전을 벌였다. 오비디오는 은신처에서 붙잡혀 헬기로 수도 멕시코시티로 이송된 후 검찰에 넘겨져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시날로아 카르텔 조직원들은 오비디오의 압송을 막기 위해 쿨리아칸 도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를 차단한 후 군 병력과 총격전을 벌였다. 조직원들은 쿨리아칸 공항에서 이륙하던 멕시코시티행 아에로멕시코 민간여객기에 총격을 가하고, 공항 일부 건물을 폭파했으며, 군용기에도 발포했다.

이날 양측의 교전으로 주민 차량 250여 대가 불에 타는 등 파손됐으며, 상점도 피해를 입었다. 군은 50구경 기관총 등 중화기를 탑재한 카르텔 무장 차량 25대에 맞서 블랙호크 헬기로 대응했다. 전쟁과 다름없는 시가전으로 국가방위대원 및 군 병력 10명과 카르텔 조직원 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등 100여 명이 부상했다. 루이스 크레센시오 산도발 멕시코 국방장관은 “국가방위대원과 군 장병들이 순직하는 등 인명 손실이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멕시코 정부의 이번 체포 작전은 1월 9~10일(현지 시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미국·캐나다·멕시코 북미 3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펼쳐졌다. 멕시코 정부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방문에 앞서 마약 카르텔과 치안 상황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정부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고자 국가방위대까지 창설해 통제에 나섰지만 지난해에만 2만6000여 건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미국인 사망 원인 1위 펜타닐

시날로아 카르텔의 우두머리 오비디오 구스만이 체포돼 압송되고 있다. [EL MILENIO]

미국 정부 입장에서 오비디오의 체포는 ‘죽음의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 제조와 밀매를 차단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시날로아 카르텔은 펜타닐의 주요 공급처 중 하나기 때문이다. 헤로인의 50배, 모르핀의 100배 중독성을 지닌 펜타닐은 원래 고통이 극심한 암 환자 등에게 극소량 투약하는 초강력 진통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최근 10년 새 유통량이 꾸준히 늘어왔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폭증세를 보여왔다. 지난해 10만7622명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는데, 이 가운데 67%가 펜타닐이 원인이었다. 현재 18~49세 미국인 사망 원인 1위는 코로나19, 교통사고, 총격 사고 등을 제치고 펜타닐 중독이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DEA는 펜타닐을 ‘미국이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마약’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펜타닐의 치사량은 2㎎에 불과하다. 뾰족한 연필심 끝에 살짝 묻힐 정도의 양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펜타닐은 필로폰이나 헤로인 등 기존 주요 마약과 달리 주사제, 정제뿐 아니라 패치제로도 사용이 가능한 데다, 처방만 있으면 약국에서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미국 저소득층은 병원에 가는 대신 진통제로 버티는 경향이 강해 펜타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또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진통제를 구할 경우 합법 약물로 위장한 펜타닐을 손쉽게 살 수 있다.

DEA는 지난해 펜타닐 알약 5060만 정과 펜타닐 가루 1만 파운드 등 3억7900만 회 분을 압수했다. 앤 밀그램 DEA 국장은 “이 정도 규모면 미국 인구(약 3억3200만 명) 전체를 죽일 수 있는 양”이라고 밝혔다. DEA는 멕시코와의 남부 국경을 통해 건너오는 펜타닐을 막으려고 애쓰지만 전체 유통량의 5∼10%만 단속되는 정도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오비디오의 신병을 인도받아 자국에서 불법 밀매되는 펜타닐 유통망을 소탕하려는 의지를 보여왔다. 마이크 비질 전 DEA 국제운영책임자는 “오비디오의 체포는 시날로아 카르텔에 중대한 타격이며 법치주의의 승리”라면서 “멕시코가 오비디오의 신병을 미국으로 인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비디오는 현재 멕시코에서 최고 수준 보안 시설인 알티플라노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하지만 그의 신병이 미국으로 즉각 인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 법원이 오비디오 변호인 측이 제기한 즉각적인 범죄인 인도나 추방 명령을 금지하는 ‘암파로’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암파로는 멕시코 등 일부 중남미 국가에 존재하는 헌법적 권리로, 개인 신병 처분에 대한 법적 구제 장치 중 하나다. 이는 범죄 혐의 여부와는 별개 판단 사안이다. 그의 신병이 인도되려면 앞으로 상당 기간 멕시코 법원에서 공방전을 벌여야 한다.


펜타닐 원료 공급하는 중국 화학업체
더욱이 미국 정부가 그의 신병을 인도받는다 해도 펜타닐을 뿌리 뽑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시날로아 카르텔과 또 다른 마약 밀매 조직 할리스코 누에바 제네라시온(CJNG) 카르텔이 중국 범죄조직 삼합회(三合會)와 결탁해 중국 화학업체들로부터 펜타닐 원료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날로아 카르텔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필로폰 제조를 위해 삼합회와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 여기에 시날로아 카르텔의 자리를 위협하는 신흥 카르텔 CJNG가 가세했다. 중국 화학업체들은 펜타닐 원료인 4-AP와 4-ANPP 등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해 멕시코로 비밀리에 운송한다. DEA에 따르면 이 두 조직은 멕시코 곳곳에 비밀 공장들을 운영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조달한 화학약품을 이용해 펜타닐을 대량 생산한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에 화학업체 단속 등 협력을 요청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반다 펠밥 브라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삼합회는 중국공산당과 정부 관리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보호받고 있는 만큼 시날로아 카르텔에 중요한 수단이 됐다”고 지적했다. 시날로아 카르텔의 경우 미국 국경에 인접한 티후아나를 펜타닐 제조 핵심 기지로 삼고 2019년부터 중국산 원료를 펜타닐로 제조해 미국으로 밀수출해왔다. 또한 이들은 미국 내 중국계 온라인 은행을 통해 암호화폐 등으로 거래 대금을 주고받아 DEA의 추적을 피했다.

미국과 중국 정부는 2018년부터 중국의 펜타닐 원료 생산자들을 단속하는 데 협력해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미국과 갈등이 고조되자 펜타닐 단속을 느슨하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는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한 이후 펜타닐 단속과 관련한 모든 대화 창구를 닫아버렸다. 미국 정부는 외교 경로 등을 통해 대화를 요청 중이지만 중국 정부는 응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 연방 검찰의 중국인 펜타닐 제조업자 수배령에도 일절 협조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펜타닐 원료 단속 문제를 놓고 벌이는 갈등과 대립은 ‘21세기 판 아편전쟁’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중국의 전신인 청나라는 19세기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의 피해자였지만, 현재 중국은 미국에서 밀매되는 펜타닐의 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실상 가해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문제 제기에 “미국인의 과도한 마약 의존이 문제인데 왜 남 탓을 하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은 “중국은 불법 마약 수출을 단속할 수많은 수단을 가졌지만 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데릭 몰츠 전 DEA 지부장은 “중국과 멕시코 카르텔의 동맹이 치명적인 펜타닐 사태를 더욱 악화하고 있다”며 “미국 내 펜타닐 유통과 밀매는 서방에 맞서 중국공산당이 수행하는 무제한 전쟁의 완벽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73호에 실렸습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