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조용한 사회공헌활동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
‘최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 있지만 ‘최초’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1982년 닻을 올린 한국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최초’라는 단어는 대부분 ‘헐크’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의 몫이다.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최초의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등에는 모두 이 전 감독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런 그에게 팬들은 ‘최초의 사나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선수 시절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남겼던 이 전 감독은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이내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됐고, 2005년에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동양인 지도자가 됐다.
이 전 감독은 2015년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던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기 위해 짐을 쌌다. 그의 표현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지만 그가 부은 물은 결국 싹을 틔웠다. 라오스에 야구협회를 만들고, 대표팀을 결성해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야구를 보급하는 것을 남은 인생 목표라고 밝힌 이 전 감독은 최근에는 베트남에도 야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이면 인도차이나반도 최초의 국제 야구대회 개최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15년 이후 동남아시아 야구 전파 활동이 주로 부각되고 있지만, 이 전 감독은 국내에서도 1년에 50곳의 학생 야구 팀, 여성 야구팀, 장애인 야구팀 등을 찾아 재능 기부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피칭머신 27대를 전국 각지의 학교 야구부에 기부하기도 했다.
사회공헌활동 결심 계기된 제리 매뉴얼 감독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회공헌활동 역사는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는 “사회공헌활동은 프로야구 초창기, 현역 선수 때부터 해왔다. 우리 시대만 해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분위기가 강해서 시즌을 마치면 몰래 병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갔고 기부도 계속 해왔다”면서 “내가 선수 때는 병원이나 고아원 찾아가서 봉사한다고 하면 구단에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제일 중요했고, 어디 가서 봉사하고 와서 성적이 잘 안 나오면 그걸 원치 않았다”고 되돌아봤다.
현장을 떠난 뒤 더 활발하게 사회공헌활동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만난 제리 매뉴얼 감독의 영향이 컸다. 이 전 감독은 “현역 은퇴를 하고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 가게 됐는데, 미국은 사회 공헌 활동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자연스럽더라”면서 매뉴얼 감독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 전 감독은 “시즌이 진행 중인데 한 고아원에서 매뉴얼 감독에게 방문해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다. 미국은 원정 경기 이동거리가 길다보니 도저히 일정이 안 나와서 (매뉴얼 감독이) 돈만 기부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니 원장이 ‘당신이 직접 와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게 중요하지 돈은 안 받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그 고아원에 방문하게 됐고, 그 일이 미국에서 기사가 많이 났다. 결과적으로 고아원 기부금도 더 늘었다고 하더라. 영향력 있는 사람의 행동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오니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더라. 예전에는 운동선수들이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기부를 안 한다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 후배들은 잘 하고 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기부를 하고 사회봉사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따라오게 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도 더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라오스 야구 보급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선수 때는 스타였고, 누군가에게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더 익숙했다. 프로야구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제부터는 받기보다는 나누고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오스로 건너갔다.” 2015년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활동 초기 모든 비용을 사비로 부담했다. 그러다 이 전 감독의 활동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고, 2016년 자신의 별명을 딴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의 재단을 만들면서 규모가 큰 사업들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이 전 감독은 “처음에 가보니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사비를 아무리 쏟아 부어도 끝이 없더라. 내가 월급을 안 받게 된지 10년 정도 지났는데,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때보다 지출이 더 많았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게 됐다. 십시일반으로 소액 기부도 받고, 지인들도 찾아다녔는데 잘 들어주지 않더라. 어렵던 와중에 광고비로 받은 돈 4억 원을 그대로 재단에 넣으면서 기반을 만들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든든한 버팀목 되어 준 내 사랑 아내
프로야구 현장을 떠나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황에 사비를 지출하면서까지 라오스 야구 보급에 앞장섰던 이 전 감독은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 전 감독의 아내는 오히려 그에게 더 많은 활동을 하라고 독려했다. 이 전 감독은 “라오스 활동 하느라 그동안 벌었던 돈을 다 써버리고 아내에게 ‘우리 이제 뭐 먹고 사느냐’고 걱정을 털어놓았는데 아내가 ‘당신이 50년 넘게 야구하면서 받은 사랑이 얼마나 많으냐. 숟가락도 못 들 정도 되면 얘기할 테니 그 전까지는 당신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차가 고장 나면 다른 차 사줄 테니 재능기부 열심히 다녀라’라고 하더라. 올해로 재능 기부 다닌 지 10년인데 아직 아내가 어렵다는 말은 안 했다”며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10년 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면서 이 꽉 물고 해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만수는 유명한 스타였는데 돈 많겠지’하면서 관심을 안 가져주면 서운하기도 하다. 그래도 ‘안 알아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해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2년 만에 12만km…전국에 안 가본 곳 없죠.”
이 전 감독의 사회공헌활동은 국내에서도 활발히 이뤄졌다. 하지만 시작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재능 기부를 할 마음을 먹고 학교마다 공문도 보냈지만 그의 유명세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였고 감독까지 역임했던 그를 초빙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것으로 알고 겁을 먹은 학교들이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이 전 감독은 “한 지도자가 조심스럽게 ‘얼마 드려야 하느냐’고 문의하기에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받는다’고 했다. 정말 한 푼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니 찾는 곳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소문이 퍼지고 찾는 곳이 늘면서 이 전 감독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게 됐다.
그는 “코로나19 이전에는 1년에 최소 50곳은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야구 명문 학교보다는 지방 소규모 학교나 야구클럽, 여자 야구팀 등을 찾았다. 프로야구 선수일 때는 큰 도시만 다니다가 재능 기부를 하면서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다. 주로 3박 4일 일정인데 모텔이나 여인숙에서 자고 기사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했다. 감독 그만두고 아내가 기죽지 말라고 사준 외제차를 2년 만에 12만km를 타서 운전 중에 차 엔진이 나가버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 그는 “강원도 고성, 전남 목포 등 재능 기부를 가기로 약속한 곳들이 있는데 빨리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은 인터뷰 동안 “야구로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은 의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신앙인이기에 내게 나눔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재능기부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송치훈 동아닷컴 기자 sch5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