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용바위를 끼고 불어치는 북서풍은 날카로웠고, 매바위는 빙벽으로 앞치마를 두른 듯했다. 용바위와 매바위 옆을 스치듯 흐르는 개울은 바닥까지 얼어붙었고, 진부령과 미시령을 타고 넘는 칼바람은 덕장에 걸린 명태를 황태로 만들고 있었다. 콧속이 쩍쩍 달라붙도록 춥고, 바람이 내복을 뚫고 들어오는 땅이라야 덕장이 들어선다는 말을 몸소 확인했다. 인제군 용대리가 황태 최대 산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몸이 황태처럼 얼어갈 즈음 뜨끈한 황태해장국 생각이 절로 났다. 즐비한 해장국집 중에서 이름난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뽀얗게 우러난 국물 한술에 몸이 풀리자 벽에 붙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명태 어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옛날 고려시대에 명태를 잡아 임금님께 상을 드렸는데 맛이 하도 좋아 무슨 고기냐고 물으시니 신하가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 서방이 잡아왔습니다’라고 하니까 임금님이 명천의 ‘명’자와 태서방의 ‘태’자를 따서 ‘명태’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는 기존의 명태 유래담을 바탕으로 자의적으로 고친 내용이다.
원래 이야기는 이렇다. “명천에 사는 성이 태(太)인 사람이 물고기를 낚아 관청의 주방 관리를 통해 도백(道伯·각 도의 으뜸 벼슬아치)께 올리도록 했는데, 도백이 이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고, 단지 ‘태 어부가 잡은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도백이 말하기를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1871년)에 실린 명태 유래담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까지 명태란 이름이 확인된 최초의 공식 기록은 1652년에 사옹원에서 승정원에 올린 장계다. 명태를 즐겨 먹었음에도 늦은 시기에 명태 이름이 기록됐다. 이는 명태(明太)라는 한자 표기가 명 태조 주원장의 묘호(사후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와 같아서 문헌에 쓰이지 못하다가 1644년 명나라 멸망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명태와 함께 북어라는 이름도 쓰였다. 말린 명태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지금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북쪽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라는 뜻이었다. 이 외에도 잡는 시기와 장소, 크기, 건조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불린다.
가장 즐겨 먹은 물고기이며 어획량 으뜸이었던 명태는 이웃 나라에까지 이름이 전파됐다. 일본 ‘멘타이’, 중국 ‘밍타이위’, 러시아 ‘민타이’는 명태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실로 명태는 조선의 물고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