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글로벌 IT업체 임원이 나이 50에 시작하는 프로젝트는
새해 3일 저녁 강남구 선릉역에 자리한 공유 오피스. 20대에서 60대까지의 남녀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우리동네좋은사람들(대표 김종훈)’의 신년 모임이다. 이 날은 꼭 일주일전인 지난 달 27일 몇몇 멤버가 대표로 수상한 한국주거복지문화대상 최우수상 시상식 보고대회도 겸했다.
모임은 한국IBM을 퇴직한 김종훈(50) 씨가 지난해 봄 만들었다. 멤버 11명은 모두 강남구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이다. 퇴근 후 격주로 서로의 빈 사무실에서 ‘고령자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주제로 하는 도시락 모임을 가져왔다.
멤버들은 연령대도, 직업도 다양하다. 공통점은 김 대표의 동선 속에 있다가 픽업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 동창인 건축가 신수진 씨는 처음부터 모임에 초대된 경우다.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의 첫 모임. 맥주집에서 앞날을 기약했다. 김종훈 씨 제공
“‘좋은 사람’이냐 여부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겪어보면 알 수 있어요. 어르신들을 모셔야 하니 그냥 일 잘하는 사람 말고,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지난 연말 시상식에 참석한 신수진 건축사의 말이다.
“어느 날 불쑥 새로 시작하는 활동을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뭔가를 한다면 제대로 할 친구라는 걸 아니까 일단 힘을 보탰죠. 그런데 활동을 함께 하면서 오히려 제 쪽이 많이 배웠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 20년을 준비하라’
돌이켜보면 지난해 초 김종훈 씨에게서 첫 e메일이 왔었다. 자기 소개와 더불어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1월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끝나고 연락드리겠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까맣게 잊었다. 그의 e메일은 온갖 스팸메일에 묻혀 뒤로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쯤 다시 e메일이 왔다. 그동안 진행해온 고령자 주거 개선 사업을 소개하며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광화문에서 만나 3시간 반 가량 얘기했다.김 씨는 2020년 말 20년간 일한 한국 IBM을 퇴직했다. 회사에서는 총괄전무로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등 1000억대 사업부문을 책임졌다.
지난달 27일 대한민국주거복지문화대상 최우수상 시상식에 참석한 우리동네좋은사람들. 왼쪽부터 아마존에서 일하는 황민선 매니저, 신수진 건축가, 김종훈 대표, 한태종 한성자동차 부장.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시상식장인 국회도서관을 배경으로 한컷.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늦기 전에 2막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사 20주년이 되던 해, ‘다음 20년을 준비하라’고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적어도 20년은 더 일할 곳이 필요한데, 더 늦어지면 시작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죠. 아내에게 3년간 충전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년 일할 준비에 3년 정도는 투자해야죠.”
그가 그리는 인생 2막은 한국의 초고령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시니어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삶이다. 특히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를 돕는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꽂혀 있다.
지난 2년간 그 준비를 위해 참 바쁘게 살았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평생교육원을 통해 행정학사에 도전했다. 다가오는 2월에 졸업할 예정이다. 서울대 웰에이징 시니어산업 최고위과정도 이수했다. 동시에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을 만들어 강남구의 마을공동체사업 주민공모에 도전했다.
“3월에 제안서 내고 심사 과정을 거쳐 6월에 강남구청과 협약을 체결했어요. 구청은 사업비 500만 원과 일본인 마을공동체 전문가를 지원해줬습니다. 타인에게 대문을 열어줘야 하는 세대 방문의 특성상 ‘관(官·구청)’이라는 배경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초고령사회’, 우리 동네에도 곧 닥칠 이슈
나이가 들면 꼭 이사를 가야 하나? 반대로 고령자 입장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살던 집과 동네에서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주거와 마을 공동체의 돌봄 기능이 뒷받침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2년간 관련 공부를 하거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느낀 겁니다.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무료에 가깝거나 아주 싼 표준화된 공공 서비스는 저소득 취약계층 위주로만 돼 있어요.
그밖의 분들은 정보 접근성이 아주 나빠요. ‘알아서 하겠지’라는 방치 속에 오히려 소외돼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또 노인이 겪는 여러 불편이나 필요한 지식들이 많은데, 당사자들도 그 자식 세대인 저희도 너무 모르고 있더라구요.”
예컨대 아들이 큰 맘 먹고 바꿔준 최신 휴대전화 탓에 과거 사용하던 기능을 쓸 수 없게 돼 울먹이던 시니어타운에서 만난 할머니, ‘마음 같아서는 휴대전화 매장에 다시 찾아가 예전 전화로 바꿔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 매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아들이 알면 서운해할까봐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고령자 낙상사고는 침실에서 가장 많아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참여할 신청자를 모집하기 위한 전단. 아파트 출입구와 엘리베이터에 부착했다.
“고령자 낙상사고가 가장 많은 곳은 뜻밖에도 침실입니다. 욕실이 아니예요. 고령자의 안전, 편의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너무 없더라구요.”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은 지난해 8월 3주간 강남구의 2개 아파트단지 총 3807세대를 대상으로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참여할 신청자를 모집했다. 최종적으로 38세대가 신청했다.
이들이 고령자 가정을 방문해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낙상 위험 방지. 미끄럼 위험 요소를 진단하고 조치를 통해 낙상 위험을 줄인다. 둘째 가구 가전 등의 재배치를 통한 동선 효율화, 셋째 불필요한 물품의 재활용, 기부 및 폐기를 통한 사회공헌.
이를 위해 ①사전 진단 방문(개인별 행동 관찰 및 인터뷰)→ ②개선 방안 협의 → ③외부 전문가 자문→ ④세대별 솔루션 선정→ ⑤국내외 우수 제품 리서치→ ⑥구매→ ⑦사전 설치 및 사용성 테스트를 꼼꼼히 거쳤다.
“별거 있나, 내가 살던 곳이니 계속 사는 거지….”
“고령자의 집은 고가 아파트라도 내부는 옛날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요. 왜 여기서 사시느냐고 여쭈면 ‘내 집이니까’, ‘살던 곳이니까’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30~40대에 입주해 자녀들 길러내고 출가시킨 뒤에도 여전히 그 동네에서 살고 계신 거죠.”수 십 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가족의 돌봄이 없다면 생활이 제대로 자리잡기는 어렵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78세 어르신은 냉장고 정리를 부탁했어요. 부인 사망 후 몇 년간 한번도 손 대지 않았다며. 모든 끼니는 밖에서 해결하고 자녀들도 집안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많은 고령자가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 불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켜지는 LED센서등을 침실과 욕실 사이 동선에 설치했다. 김종훈 씨 제공
고령자 댁 침대에 부착한 안전바. 고령자들이 침대에서 내려올 때 낙상사고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안전바는 이를 방지해주는 기능을 한다. 김종훈 씨 제공
고령자댁 욕실에 장치를 설치한 모습.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았고 욕조에 안전바를 달아 의지할 수 있게 했다 . 앉아서 샤워할 수 있는 의자도 제공했다. 김종훈 씨 제공
고령자 부부만 사는 집에서 너무 크고 자리를 차지하는 6인용 식탁을 치워드렸다. 김종훈 씨 제공
이들은 고령자의 침대와 욕실에 안전바를 설치하고 침실과 욕실 사이에 LED 센서등을 달아줬다. 욕실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샤워 의자를 제공했다.
고령자 부부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정리해 처분한 것도 반응이 좋았다. 이런 일을 하며 구청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자비로 썼다.
침대와 욕조에 안전바를 설치받은 69세 어르신은 “3개월 전 욕조에서 넘어져 무릎 슬개골 골절로 수술을 해야 했다”며 좀더 빨리 만났더라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몇차례의 방문을 마무리하던 날 그녀는 “낙상 이후 생활이 집과 병원만으로 바뀌어 우울증이 왔는데 여러분 덕분에 힐링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인생 2막 준비에 3년 투자, “마음은 급해지지만….”
요즘 그는 약간 속도를 내고 있다. 부인에게 약속한 3년의 유예기간 중 딱 1년이 남았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해나갈 사회적 기업 창업을 생각하고 있지만 누구와 어디서 일을 시작할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가요.
“노인 관련 일은 모두 공짜, 무료 봉사라는 시선이 너무 강합니다. 할 일은 여기저기 보이고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서 출발할지 그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큰 성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지속 가능성은 담보돼야 하지요.
멤버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번듯한 직장인인 그들에게 급여도 보장 못하는 창업을 함께 시작하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는 혼자 힘으로 어떻게 건 창업을 해내고 자리가 잡힌다면 멤버들에게도 손을 내밀어볼 생각이라고 한다.
당초 그의 동네가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기서도 못한다면 어려운 지역에서는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많든 적든 나이는 사람을 약하고, 외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여유를 빌어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닐까.
“남은 1년, 뭔가 만들어내야죠. 3년을 쏟아붓는데 뭔가 돼 있겠지요. 전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이 좋았어요. 그 분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기쁩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