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길이 약 18.6km에 달하는 한양도성을 표시한 지도. 서울시 제공
수토는 원래 ‘샅샅이 수색하여(搜) 토벌하는(討)’ 의미를 가진 공격적 단어인데, 감추어진 참(진리)을 치열하게 파헤쳐내는 학문적 행위를 뜻했다. 그러다가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국토를 탐구하고 즐기거나, 풍토가 달라 벌어지는 세상의 변화 등을 관찰하는 행위로 확장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우리 땅을 넘보는 적들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행위도 본격적으로 ‘수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아예 ‘수토사(搜討使)’라는 국가 공인 관직도 생겨났다. ‘수토(守土)’의 성격까지 띤 수토(搜討)는 자연히 땅의 기운을 다루는 풍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수토 코스 중 하나가 한양도성을 한바퀴 돌아보는 순성(巡城)놀이였다. 순성은 원래 한양도성 성벽을 점검하며 순행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점차 민간의 풍류로 정착됐다. 조선 정조 때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멋 있는 놀이”로 순성놀이(巡城之遊)를 소개했다. 순성놀이는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 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지만,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도 많다고 부연 설명도 했다.
한양도성 순성길의 남산구간. 산 등성이를 따라 성벽(복원)이 설치돼 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하루만에 성 한바퀴 돌아야 소원 성취
순성놀이는 구복적 행위로도 ‘발전’했다. 이와 과련해 대일항쟁기인 1916년에 ‘매일신보’가 순성장거(巡城壯擧)라는 이름으로 순성놀이 행사(1916년 5월14일 시행)를 소개한 기사가 흥미롭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옛날 과거를 행했던 때에는 당시의 고등문관(高等文官;일제가 시행한 고급관료제) 후보자가 순성을 했다”면서 친일파 관료인 백작 이완용, 자작 박제순 및 임선준 등이 청년 시절 순성놀이를 했다고 전했다. 순성을 하고 나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단 순성놀이 성공에는 조건이 있었다. 순성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꼭 하루만에 마치지 않으면 효험이 없다는 것이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성을 도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서대문이나 동대문에서 출발해야 했다. 서대문에서 시작하면 성문을 한번 돈 다음 곧장 직선거리로 3km 떨어진 동대문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순성에 나서고, 반대로 동대문에서 시작하면 마찬가지로 성문을 돈 다음 서대문으로 가서 순성을 하는 식이다.
이는 경복궁을 둘러싼 한양도성을 입 구(口) 자 모양으로 보고, 그 가운데를 사람이 직선으로 걸어감으로써 ‘중(中)’자를 성립시킨다는 의미를 띤다. 한자어 중은 ‘적중’ 혹은 ‘관통’의 의미가 있어서, 과거 시험에 길한 점괘와도 같다. 이게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응시생들이 너도나도 순성 놀이에 가담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서대문(돈의문)이 대일항쟁기때 일제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없어져 버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성놀이는 관직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소원만 들어주는 게 아니다. 서울 종로의 상인들도 복을 받기 위해 순성놀이에 나섰다. 주로 봄과 여름철에 상인들은 남 몰래 성벽을 한바퀴 돌면서 상점의 번영과 운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성벽을 한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한양의 서북쪽 관문이 창의문. 조선초기의 지관 문맹검이 ‘하늘의 천주성’ 기운이 감돈 명당 터로 지목한 곳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먼저 한양도성 서북쪽 관문인 창의문(자하문, 장의문)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천기(天氣)가 왕성한 곳이다. 조선 초기의 지관 문맹검은 창의문을 하늘의 천주성(天柱星·하늘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별자리) 기운이 깃든 곳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평소에 닫고 보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또 남대문에서 소의문 터로 이어지는 성벽재현 구간에 자리잡은 대한상공회의소는 보기 드문 지기(地氣) 명당 터다. 지기는 풍요와 재물의 기운으로 본다. 바로 이 일대는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내던 주전소(鑄錢所)기 있던 곳이기도 해서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명소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상공회의소(왼쪽) 건물 외벽이 복원한 한양도성 성벽이다. 성벽은 남대문을 거쳐 멀리 남산 정상에 보이는 남산타워 쪽으로 이어진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