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수상한데….’ 중국 반도체 소재 회사인 D사로 이직한 40대 연구원의 이상 동향이 국내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은 지난해 초였다. 이직 전 회사의 업무용 노트북을 “바이러스에 걸렸다”며 폐기해버린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기존 회사의 서버 등에서 찾아낸 이메일 기록에서는 민감한 기술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이 발견됐다. 그와 비슷한 시기 D사로 옮긴 다른 한국인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었다.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연구원 6명이 최근 재판에 넘겨졌다. 주도적 역할을 한 50대 연구원은 2018년 임원 승진에서 탈락한 뒤 중국 회사로의 이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승진 탈락에 앙심을 품은 상태에서 “연봉의 3배 이상을 주겠다”는 중국 측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는 중국 회사와 동업을 약속하고도 태연히 기존 회사에 근무하며 반년 넘게 기밀자료들을 빼돌렸다. 그 기간에 동종업계 연구원들을 스카우트해 먼저 중국에 들여보냈다. 장시간에 걸친 치밀한 준비 작업이었지만 끝내 덜미가 잡혔다.
▷반도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군사, 항공우주, 바이오 등 타깃이 되는 첨단기술 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반도체 분야에서 빠져나간 주요 기술은 100건을 훌쩍 넘는다. 해킹과 내부자 매수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지만 주된 루트는 결국 인력 자체의 이동이다. 승진 누락자나 퇴직자 등 보안 관리가 느슨해진 이들의 빈틈을 노린다. 기술 유출 사건으로 검거되는 혐의자의 46%가 퇴직 인력이다.
▷첨단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산업을 넘어 국가 이익을 훼손하는 매국적 범죄 행위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적발된 기술 유출 건만 해도 피해 규모가 25조 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막겠다고 연구원 개개인의 애국심이나 도덕성에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핵심 인력을 붙잡을 인센티브와 유출 시 엄벌하는 시스템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해외로 기술을 유출한 산업스파이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 처벌로는 “수백억 원 받고 팔아넘길 만하네” 같은 소리만 나올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