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문화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국가보훈처로부터 업무계획을 보고받은 뒤 “보훈 대상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의 서훈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할 문제가 여럿 있다.
8차례 기각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서훈 문제도 그중 하나다. 대동단을 조직한 동농은 1919년 10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해 불꽃처럼 독립운동을 벌였다. 대동단 활동으로 서훈된 이가 80여 명에 이르지만 총재였던 동농은 아직도 훈장을 못 받았다. 지난해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서훈과 유해 봉환 추진 여론이 형성됐지만 끝내 무산됐다.
보훈처는 기각 사유를 “일제강점 전후 행적 이상(의병 탄압, 수작(受爵·작위를 받음), 강제병합 찬양 논란 등)과 독립운동에 대한 종합적 평가”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의치(義齒)까지 뽑아 던지고 상하이로 떠난 이에게 남작 작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의병 탄압도 그가 아니라 일본군이 벌인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다음으로 죽산 조봉암(1898∼1959)의 서훈 문제다. 독립운동가로 7년 옥고를 치렀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이끈 죽산은 대한민국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죽산은 간첩 누명을 쓰고 살해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죽산을 제대로 서훈해야 역사가 바로잡히고 나라의 정체성이 뚜렷해진다.
보훈처가 죽산의 서훈을 거부하는 건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1941년 매일신보 단신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기사를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모진 고문과 추위로 손가락 7개를 잃고 출소한 뒤 생계를 위해 비강(왕겨) 조합장으로 일하던 그가 일제의 강요를 거부했어야 했다는 건 너무 가혹한 주장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작은 흠을 이 잡듯이 뒤지자면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에게 1962년 주어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해는 1941년 8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지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열린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확대하며 2005년 건국훈장을 받은 몽양 여운형(1886∼1947) 역시 행적 관련 논란이 있다.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뇌했던 거인들일수록 숨을 곳 없는 일제 치하에서 더 많은 풍파를 겪었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애를 큰 틀에서 평가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스스로 앙상하게 만들게 된다. 거목의 정체성을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 숙제에게서만 찾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