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나 잡아 봐라”
그때도 겨울이었다. 학생들과 차를 빌려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하염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고속도로. 다소 황량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한 풍경 속에 이따금 집들이 저 멀리 보였다가 사라졌다. 앞에 앉은 학생이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살다니, 저들은 속세를 떠난 사람들일까요.
내가 대답했다. 아닐 거 같은데요. 정말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라면, 아예 산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데요. 고속도로를 지나는 여행객 시야에 들어올 만한 곳에 살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어쩌면 저들이야말로 궁극의 ‘관심종자’인지도 몰라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보다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그들을 판별할 수 있잖아요. 바로 그런 관심을 원하기에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거고.
그렇지 않은가. 진짜 관심을 원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고, 그러한 요청은 일정한 거리를 둘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연인들이 해변에서 일종의 예식처럼 행하곤 하는, ‘나 잡아 봐라’ 놀이를 떠올려 보라. 상대는 결코 연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야 연인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상대 바로 옆에 있지도 않는다. 그러면 연인이 애써 관심을 기울여 자신에게 접근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를 유혹한다. 나 잡아 봐라∼.
그 적절한 거리는 바로 모호함을 통해 유지된다. 좋은 예술작품은 때때로 내 가슴에 내려앉은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모호하다. 단순 명료한 것은 식당에서의 음식 주문에나 어울린다. “짜장면 한 그릇 주십시오.” 주문할 때는 이처럼 명료한 언어가 최적이다. 예술적으로 말한답시고, “짜자자 응응 며언 한 사발 줄 듯 말 듯.” 이렇게 말해 보라. 주문도 되지 않고 예술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모호하되, 생산적으로 모호해야 한다. 분명하되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표현은 아기의 눈동자처럼 분명한데, 그 의미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울 때 그것은 예술이 된다.
미국 팝 아티스트 웨인 티보의 작품 ‘닦다’(왼쪽 사진)는 테니스 선수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명료한 이미지를 담았다. 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사연이 뭔지에 관한 다양한 상상을 이끌어낸다. 오른쪽 사진은 프랑스 화가 루이 이에를의 회화 ‘이브’.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은 뒤 비탄에 잠긴 성서 속 이브를 묘사했다. 티보의 ‘닦다’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사진 출처 크리스티 경매 홈페이지·미국 ‘아트 리뉴얼 센터’ 홈페이지
여성이 얼굴을 감싸 쥐고 우는 그림은 회화사에 꽤 존재한다. 루이 이에를이 그린 ‘이브(Eve)’라는 그림을 보라. 벌거벗은 이브가 얼굴을 감싸 쥐고 비탄에 잠겨 있다. 이른바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과 이브는 그저 행복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뒤로 아담과 이브는 나체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이브가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아직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은 아마도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한 후회 때문일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우는 여자’는 이에를이 그린 성서의 이브와 달리, 현실 속의 여인이다. 사진 출처 시카고 미술관 홈페이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