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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이상훈]일본, 한국인의 신뢰 얻어야 할 때

입력 | 2023-02-01 03:00:00

‘韓 못 믿겠다’는 日 스스로 믿음 차버려
‘日 뭐하나’ 비판 나오면 합의 무용지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서로 허공에 자기 할 말만 하던 때와 달라졌다. 말을 마치면 궁금한 걸 묻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대화가 이뤄졌다.”

지난해 여름 일본 도쿄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논의한 한일 외교 당국 국장급 협의가 열린 뒤 한 외교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이 소식통은 “따로 놀던 두 나라가 일단 경기장에 들어온 느낌”이라고 비유했다.

일본 정부와 주요 언론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다. 한국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해 “국제법을 위반했다” “한국이 책임지고 답안지를 가져오라”고 하던 말이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대위 변제, 병존적 채무 인수, 제3자 변제안같이 한국에서 전문가와 정부 등이 검토하는 해결 방안에 대해 일본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 국제법 담당 조직이 강제동원 논의의 장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로부터 반년가량 지난 1월 30일 서울에서 국장급 협의를 마치고 한일 외교 당국 관계자들은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서로 같은 말을 했다. “폭넓은 이슈에 대해 좁혀진 측면도 있지만 좁혀지지 않은 것도 있다.”(한국)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한쪽이 곤란해하는 의견도 교환했다.”(일본) 인식차는 여전하지만 ‘다른 생각을 좁혀 현실적으로 풀어보자’는 단계로 넘어간 시점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불신을 얘기한다. 전임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어긋난 판결을 했으니 한국이 약속을 깨지 않겠다고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피고기업(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에 대한 구상권 청구를 포기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피고기업의 (피해 배상) 기금 참여가 필요하다는 한국 측 요청에 일본은 ‘기업에 강요할 수 없다’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양국 간 신뢰는 어디서부터 사라졌을까. 2015년 12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상(현 총리)이 “아베 신조 총리는 진심으로 사과,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한 이듬해 아베 당시 총리는 국회에서 “(사과 편지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불과 1년 전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자 이에 반발하는 한국에 “역사전쟁을 피하지 말자”고 부추긴 것도 아베 전 총리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표현) 문제도 미해결인데 시기상조.’ ‘반성, 사과는 절대 안 된다.’ 지난 일주일 새 집권 자민당 의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캘린더 도발’도 있다. 2월 다케시마의 날, 3월 교과서 검정, 4월 외교청서 발간,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공물 봉납 등 매년 같은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 왜곡, 독도 억지 주장, 군국주의 미화 수위는 높아진다. 2015년 군함도 등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시 한인 강제 노역을 비롯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겠다던 일본 정부의 약속은 지켜질 기약이 없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지난해 내내 윤석열 정부가 ‘지지율이 낮으니 언제 반일 카드를 꺼내들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측 반발은 거세고 한국 내 여론도 냉랭하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관계 개선을 위해 우직하게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럴 때 일본이 성의 있는 자세를 보여 한국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면 ‘구상권 청구 주장’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일본은 대체 뭘 하는가’라는 의문이 한국에서 커진다면 양국 간 어떤 합의도 무용지물이 될 터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