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애호가였던 요시다 시게루(왼쪽)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은 미국과 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일동맹, 바로 그 조약이다. 불과 6년 전까지 사생결단으로 태평양 전역에서 싸웠던 두 나라, 승전국이 패전국을 점령하여 지배하에 둔 관계였던 두 나라가 갑자기 군사동맹이 된 것이다. 소련이 팽창하고 중국이 공산화되고, 무엇보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
경제 개발 올인… ‘요시다 독트린’
얼마 전 일본 정부는 방위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늘리고, 상대방의 공격을 단념시키는 ‘반격 능력 확보’를 선언해 일본 우파의 오랜 숙원이었던 자위대 ‘국군화’에 코앞까지 다가섰다. 이렇게 하는 구실 중 하나가 북한의 안보 위협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일본 우파에는 천우신조(天佑神助) 같은 존재다.
미군정의 일본 측 파트너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였다. 미군 점령하에서 일본 내각의 총리를 5번이나 역임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국가 노선을 확립하여 전후 일본을 회생시켰다. 외교는 철저히 친서방 노선을 취하고, 국방은 미국에 맡겨 군사력을 갖지 않으며, 일본은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매진하는 방침이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오히려 미국이 일본 재무장을 주장했으나, 요시다는 이에 저항하여 ‘비무장-경제개발’ 노선을 관철했다.
5회 역임, 역대 최다 집권 총리
1946년 5월 요시다는 내각총리대신, 즉 총리가 되었다. 아직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기에,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천황이 조각의 ‘대명(大命)’을 그에게 내렸다. 말하자면 그는 구 헌법에 따른 최후의 총리였다. 외교관 경력만 있고 국회의원을 한 적도 없는 그에게 총리 자리는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원래 총리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당시 일본자유당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가 예약해 놓은 자리였다. 1946년 패전 후 최초의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제1당이 되었다. 4월 30일, 전례에 따라 당시 총리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는 천황을 만나 하토야마를 후계 총리로 주청했다. 그런데 며칠 뒤인 5월 4일 점령군 총사령부는 군국주의에 협력했다며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 버렸다.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리 자리를 내줬던 하토야마 이치로 당시 일본자유당 총재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일제 만행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 동아일보DB
도와주며 실리 챙긴 ‘맥아더 절친’
미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왼쪽)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전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 요시다는 일각에서 ‘미국의 푸들’이라 불린 아베 신조 전 총리보다도 더 미국에 협조적이었으며 ‘훌륭한 패자’가 될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요시다와 흔히 비교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둘 다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반공 정치가였고, 미국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 심심치 않게 들이받은 데 비하면, 요시다는 시종 온화한 태도로 미국을 대했다. 아무래도 이승만에게 ‘푸들’의 이미지는 없다. 2년의 시차를 두고 미일동맹, 한미동맹이 체결되었는데, 미일동맹이 요시다와 맥아더, 나아가 미국 정부 간에 형성된 신뢰감으로 성사되었다면,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협박 등 훨씬 험한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한국전쟁이라는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이승만에 비하면, 요시다는 그가 좋아하는 시가(cigar)를 즐길 여유가 훨씬 많았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