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통일부 주최 정착사례 발표 대회에서 강해룡 씨(왼쪽)가 정인성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원산항에 한국 쌀이 들어오면 며칠 동안 항구 정문 앞에 화물차량들이 길게 늘어섰다. 대다수가 군용 트럭들이지만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군용 차량 번호를 대충 뻑뻑 지우고 그 위에 민간 번호를 썼다.
그렇게 눈속임을 해도 쌀을 접수하러 온 사람들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비록 사복 차림이긴 했지만 운전사도, 호송원도 머리를 빡빡 깎은 20대 청년들이었다.
강 씨는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는 40㎏ 포대에서 처음 쌀을 꺼내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건 쌀이 아니라 하얀 눈덩이였다. 그렇게 하얀 쌀은 처음 봤다.
도정이 잘 안돼 누런 북한 쌀은 쌀함박(이남박)으로 일고 또 일어도 꼭 돌이 남았다. 그래서 북한 쌀밥은 조심스럽게 씹어야 한다. 잘못 씹었다가 이가 부서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 쌀은 돌이 전혀 없었다. 밥을 안심하고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한국 쌀밥을 먹을 때마다 강 씨는 생각했다.
“아, 한국은 정말 발전했구나.”
# 잘사는 부대
강 씨가 군 복무를 한 부대는 원산에 주둔한 1지구사령부(군단급)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였다. 군단으로 공급되는 거의 모든 물자가 그의 부대 차량에 싣고 오갔다. 떡 주무르는 놈이 콩고물도 많이 먹게 되는 법이다. 그의 대대는 북한군 전체에서도 상위 1% 안에 들어갈 만큼 복무 환경이 좋았다.훔쳐 먹으려고 해도 민가가 많지 않아 훔칠 곳도 없다. 그래서 강원도는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군 복무하려 가는 곳이자 군에 갔다가 영양실조로 제대되는 병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 씨의 운수대대는 훈련도 별로 세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했다. 주변에는 삐쩍 마른 군인들이 많지만 그의 부대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쌀 지원이 오면 쌀을 싣고 오다가 슬쩍 ‘조절’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훔쳐온다는 말을 듣기 좋게 ‘조절해온다’고 표현한다.
쌀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들여오는 각종 약도 그의 운수대대가 날랐다. 대다수 탈북민이 북에 살 때 구경도 못했던 소고기도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2001년 유럽에서 광우병 파동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독일에 도살된 40만 마리를 무료로 줄 것을 요구했고, 독일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만t 정도 실제로 북에 보냈다. 그 소고기를 군단에 싣고 올 때 강 씨는 질릴 정도로 많이 먹었다.
이렇게 좋은 부대인지라 북한에서 힘깨나 좀 쓴다는 간부들은 자식들이나 친척들을 운수부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강 씨가 부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대장의 첫 질문이 “넌 누구 부탁자냐”였다. “누구의 빽이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강 씨는 운전 교육을 받지 않고 신병으로 입대해 바로 온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운수대대이긴 하지만 모두가 운전병일 수는 없는 법이다. 경비나 통신병 등은 일반 신병 중에서 뽑았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엔 강 씨가 북한에서 엄청나게 힘 있는 간부집 자식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은 아니었다.
# 행운의 병사
강 씨는 1982년 함북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범한 철도 건설 노동자였는데, 그가 15세였던 1997년에 사고로 사망했다. 군에 가기 전 그의 삶은 남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대다수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군에 가야 하는 정해진 수순대로 살았다.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아 대학에 갈 꿈도 꾸지 못했다.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자 그의 집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마는 배낭에 공업품을 메고 황해도로 나가 쌀과 바꾸어왔다. 이렇게 지역을 오가며 물건을 바꾸어 차익을 버는 사람을 북한에선 ‘달리기’ 또는 ‘행방’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죽도 먹기 힘든 때도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해 군대에 갈 때쯤 되니 학급 동창들의 운명도 갈렸다. 제일 살이 찐 간부집 자식들은 대학에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영양실조 오기 전의 삐쩍 마른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군에 가야 했다. 강 씨가 졸업해 군에 가던 2000년에만 해도 군에 가면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말이 만연해 있던 때였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피 지역이었다. 강 씨도 실제로 강원도에 갔다가 실조차 없어 쇠줄로 군복을 꿰매 입고 집으로 돌아온 영양실조 환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강원도로 갈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결정적인 ‘빽’은 있었다. 군사동원부(병무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많이 힘을 썼다고 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강원도로 배치됐다. 하지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최전방 1군단이나 5군단은 피하고 원산에 주둔하고 있는 1지구사령부 신병연대로 가게 된 것이다.
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배고픈 고생이 뭔지 알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가 2000년 8월 강원도 덕원에 위치한 신병훈련소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배고프지 않게 먹여주었다. 알고 보니 바로 한 달 전인 7월 4일에 김정일이 부대를 시찰했다. 그 덕분에 현지시찰 ‘뽕’으로 적어도 몇 달은 부대에 대한 공급이 좋아졌다.
신병훈련 기간에 그는 또 훈련소 정치부장(상좌)의 눈에 들었다. 학교에 다닐 때 강 씨는 아코디언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때 예술학원에 입학하려고도 했지만 예술을 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배웠던 아코디언이 신병훈련소에서 준비하는 예술소조 공연 때 빛을 발휘한 것이다. 정치부장은 아코디언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강 씨를 눈여겨 보았다. 그가 힘을 써주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영문도 모르고 부탁자들만 간다는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로 배치됐다.
강해룡 씨가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어렸을 때 아코디언을 했던 경험이 있어 한국에 와서 피아노 연주도 열심히 배웠다.
# 배부른 병사
운수대대는 일반 부대와 구성이 좀 달랐다. 대대 전체 인원이라고 해봐야 초기복무(부사관) 군인까지 포함해 120명 정도로 대다수가 운전병이었다. 차량은 러시아제 신형 지르와 중국제 둥팡(東方) 트럭이 대부분이었다.운수중대는 지구사령부 각 부대에 후방 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지만 물자 이송 명령이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병들은 쉬는 날이면 부대 간부들의 묵인 아래 차를 끌고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 물건이나 건설 자재를 날라주고 돈을 받은 뒤 간부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잘 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강 씨가 부대에 갔을 때 마침 2중대의 위생지도원(위생병)이 제대돼 자리가 비었다. 그는 신병에서 바로 위생지도원으로 발탁됐다. 위생지도원을 하려면 위생지도원 강습소를 6개월 마쳐야 했다. 주사를 놓는 법, 붕대를 감는 법 등 응급 치료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특별 직종에 대한 강습을 6개월 받게 되면 나름 ‘전문직 군인’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다.
강 씨는 2009년 제대할 때까지 부대 위생지도원으로 있었다. 위생지도원은 알고 보니 매우 편한 자리였다. 훈련병은 정기 훈련에도 잘 참가하지 않았다. 또 젊은 군인들인 데다 잘 먹는 부대라 환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끔 군관 또는 부사관 가족들이 밤중에 아프면 달려가 주사를 놔주는 일 정도가 약간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운수부대 약품 창고도 유엔약 등으로 빵빵하게 차있었다.
운수대대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나름 번화가인 갈마역 앞 소도시 가운데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부대 주변에 ‘사택’이라고 부르는 가족처럼 다니는 민가 하나씩은 꼭 끼고 있었다. 식량 등을 가져다주는 대신 밥을 얻어 먹거나 휴식을 취한다.
하도 군인들이 계속 민가에 몰래 드나드니 부대 간부들은 담장을 2m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유리를 박거나 인분을 뿌리는 등 외출 방지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런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젊은 군인들은 2m 높이 담장 쯤은 쉽게 타고 넘어갔다. 강 씨 역시 짬만 나면 자신의 ‘아지트’로 갔다. 배불리 먹고 필터 담배를 피우며 한국 드라마를 봤다. 당시 ‘줄리엣의 남자’ 등이 원산에 많이 퍼졌다.
한국 드라마를 보았지만 화면 속 세상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희한한 세상이구나 싶었지 자신이 그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병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도 한국 노래들이었다. 대개는 그것이 한국 노래인지도 모르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울에 오고 나서야 그게 한국 노래인줄 알았다.
강 씨는 약을 민가에 갖다 주어 편의를 제공받긴 했지만 제일 많이 가져다 준 것은 식량이었다. 가을이면 편한 보직인 위생병은 후배 5명 정도를 거느리고 정기적으로 안변에 있는 오리목장에 옥수수밭 경비로 차출됐다. 37정보(1정보=0.99헥타르)의 대규모 옥수수밭이었는데, 이때가 대목이었다. 밤에 옥수수를 따 자신이 다니는 사택에 수백㎏씩 날라줬다. 도둑을 막으라고 보냈는데, 경비병이 사실상 도둑인 셈이다.
간부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타 부대 도둑들보단 자기 부대 병사들이 몰래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경비를 나가 옥수수를 따다 날라주면 그 대가로 1년은 언제든지 그 집에 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옥수수 경비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으면 제일 행복했다. 배불리 먹고, 옥수수를 팔아 필요한 것도 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군대에 나오길 참 잘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군에 나오면 집에 있을 때보다 먹지 못해 늘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이웃에 주둔한 정예부대라는 ‘108훈련소(군단급)’만 해도 ‘배고파훈련소’라고 무시를 당했다. 하도 병사들이 먹지 못해 구걸을 다닌다고 해서 ‘백공팔’을 ‘배고파’로 바꿔서 부른 것이다.
하지만 강 씨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집에 있을 때는 죽을 먹으며 배고프게 지냈는데, 군에 나와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같은 북한군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다.
강 씨는 경비에 차출돼 나갔다가 본 후방사령부 오리목장 지배인의 집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투명한 고강도 유리로 덮은 큰 수족관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안변 산골에 있는 후방사령부 소속 지배인조차 오리고기와 식량을 물 쓰듯이 뿌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 “돈만 잘 벌면 된다”
어느덧 군 복무 7년쯤 지나자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입당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북한에서 군에 가서 남자들이 받아올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이 노동당 입당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도 입당도 하지 못하고 오면 사회에 나와서도 모자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입당 추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등 부대 간부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위생지도원이라 수시로 호출할 때마다 달려가 성심성의껏 돌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비슷한 또래는 입당하는데 그는 부르는 데가 없었다. 친한 간부가 그에게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너는 엄마와 남동생이 행방불명이 돼서 입당이 어려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군에 나온 지 4년차인 2004년에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이 인민군대도 두부콩 농사를 지어 병사들이 허약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대에선 콩 종자 30㎏을 가져오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는 자원해서 집에 갔다. 그 때만 해도 엄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친척집을 다니다가 작은 고모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그에게 가만히 이야기했다.
“고모는 남조선에 갔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냥 고모의 일이니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줄 알았다. 2005년에 다시 핑계를 대고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없었다. 친척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지금 엄마가 중국에 갔는데 돈을 벌어 돌아올 거야. 기다려봐.”
부대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07년이 돼도 엄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고향에선 엄마를 행방불명자로 문서에 등록했다. 이것이 신원조회 과정을 거치며 부대까지 통보된 것이다.
가족 문제로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밀고했는지 가끔 부대 간부들이 찾아왔다. 군단 보위부장은 그를 불러 “장군님은 네 부모가 미국이나 중국에 가도 상관없이 너를 품어주실 것이니 딴 생각하지 말고 부대 생활 열심히 하라. 너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어느새 그는 고민하다 사고를 칠 수 있는 요시찰 인물로 등록된 것이다.
강 씨가 동네 산책 중에 잠시 쉬고 있는 모습.
제대를 몇 달 앞둔 2009년 집에 갔을 때 예전의 그 친척이 또 귀띔해주었다.
“해룡아, 네 엄마와 동생은 지금 남조선에 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입당을 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당규약집을 다 외워야 입당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외우기를 죽어라 싫어하니 그 두꺼운 당규약을 어차피 다 외우지도 못할 건데 차라리 잘 됐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제대 후 진로도 어렵지 않게 결정됐다. 사회에 나가서 손가락질 받을 바에는 엄마를 따라 남조선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며 강 씨는 “입당을 했었다면 한국에 오길 망설였을 것인데, 노동당에도 받아주지 않으니 ‘여기 남아 뭐해’라는 오기가 생겨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위 당간부 자식이 그에게 위안이랍시고 건넨 말도 진짜로 위안이 됐다.
“입당은 무슨 입당이냐. 해룡아, 사회에 나가선 돈만 잘 벌면 네가 인생 승리자야.”
# 탈북
2009년 5월 마침내 그는 제대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무리배치자’에 포함됐다. 무리배치란 당국이 딱 정해준 힘든 탄광이나 농촌 등에 제대군인들을 집단적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노동당은 그를 어랑천발전소 건설장에 갈 것을 명령했다. 어랑은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에 있는 곳이다.어랑천발전소란 말을 듣자 그는 놀랐다. 분명 인민학교 때부터 어랑에 발전소를 짓는다고 돈을 걷어가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가 제대될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한국에 와서야 어랑천발전소가 1981년에 건설이 시작됐고, 그가 한국에 온지 13년 뒤인 2022년 8월에 완공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를 하나 짓는데 무려 41년이나 걸린 것이다. 거기에 갔으면 젊음이 증발될 뻔 했다.
제대된 뒤 그는 어랑에는 가지도 않았다. 집에서 좀 쉬다가 직장에 간다는 핑계를 내걸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얻어먹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날 건데 눈치 볼 것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쭉 돌아보니 놀랍게도 많은 친척들이 그새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은 고모와 엄마는 물론이고, 외삼촌 가족, 이모 가족 등이 다 슬금슬금 사라져 줄을 타고 남쪽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모부는 첫째 아들만 한국으로 오는 데 성공했고, 이모와 둘째 아들은 탈북 과정에 체포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한국으로 간 친척이 많으니 엄마와 연락하는 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국경까지 와서 산에 올라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다.
“엄마는 돈을 지금 벌지 못해 동사무소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산다. 네게 보내줄 돈이 없으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여기 와라.”
“엥? 거긴 나라에서 먹고 살라고 돈도 준다고? 정말 좋은 나라네.”
2009년 11월 마침내 그는 한국을 향해 떠났다. 국경 도시인 무산까지 와서 밤에 강을 넘겨줄 선을 찾아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도강하기로 한 날 이틀 전에 현지에서 12명을 한꺼번에 공개 총살하는 일이 있었다. 대개가 불법 월경 연관자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가다가 잡히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어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엄마를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공포를 눌렀다. 마침내 강을 건너기로 한 날이 왔다. 브로커가 그를 찾아와 집에 데리고 갔다. 그날 그와 함께 강을 건널 사람 6명이 그곳에 모였다.
브로커의 집에는 김일성과 함께 찍은 소위 ‘1호 사진’이 5~6장이나 벽에 걸려있었다. 지방에서 김일성과 그렇게 많이 사진 찍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브로커는 먼저 “내가 무슨 사람인지 묻지 마”라고 선수를 쳐 입을 막았다. 브로커는 얼음(필로폰)을 뻐끔뻐끔 빨아대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이렇게 위험한 도강을 주선해 번 돈으로 마약을 사서 탕진하는 것 같았다.
일행은 그날 밤 무사히 강을 넘었다. 여러 명이 함께 강을 건너니 어차피 잡혀 죽어도 혼자 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조금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강을 건너 캄캄한 북한 땅을 건네다 보니 마음이 아팠다
“총을 들고 9년을 지킨 저 땅에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연길에 들어오니 무서웠던 마음도 싹 가라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밝은 도시가 있을 수가 있구나.”
음식들도 너무 맛이 있었다. TV를 보니 채널이 너무 많아 끝도 없어 넘겨야 했다. 점점 북한을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탈북할 루트를 잘 연결해준 덕에 그는 11월 7일 두만강을 건너 한 달 만인 12월 10일 한국에 도착했다. 탈북민 사이엔 이런 경우를 ‘초고속 직행’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오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보는 모든 게 새롭고 황홀했다.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내 생애에 비행기를 다 타보는구나”싶어 너무 기뻤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반들거리는 대리석을 보고 “여기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나, 벗고 들어가야 하냐”며 고민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는 “내가 여기에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 다시 시작된 간호사의 삶
2010년 5월 마침내 하나원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그는 김포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지역을 배정받았다. 6년 만에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동생은 소년단 넥타이를 메고 있을 때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강해룡 씨.
사회에 나왔지만 여기는 북한처럼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한국 사회를 더 많이 체험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인력사무소에 나가 건설판도 다니고, 각종 아르바이트도 전전했다. 한국에 와서 기뻤던 마음이 힘든 일을 하면서 점점 지쳐갔다.
“여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지? 여긴 왜 일이 이렇게 힘들지?”
1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피곤에 찌든 몸으로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그날도 피곤한 몰골과 무표정한 눈빛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밖에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판이 보였다. 간호조무사학원 간판이었다.
“아, 내가 6개월 양성소를 졸업한 인민군 위생지도원이었지. 간호사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자 학원에선 국비로 학비의 80%까지 지원된다고 설명해줬다.
“그래, 여기서도 한번 간호사를 해보자.”
한국에 와서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더 오랜 시간 허둥대며 더 높은 곳을 보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힘든 육체 노동을 1년 동안 하니 그제야 간호사라는 직업도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즉시 학원에 등록해 1년 동안 다녔다. 조무사학원을 다니다보니 그제야 간호대학이 있다는 것도, 간호사와 조무사가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왕 시작했던 바에야 간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조무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을 준비해 2012년 가천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4년제 정규과정을 밟게 됐다.
처음엔 나이 30세가 넘어 대학에 과연 잘 다닐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정작 가보니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40세 후반 학생들도 있었다. 또 “남자가 간호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대학을 다니며 떨쳐냈다. 알고 보니 응급실 등 특수파트에는 남자 간호사가 태반이었다.
간호학과 공부는 쉽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북한에선 의사가 되고도 남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입학했다는 생각 때문에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를 따라갔다. 각고의 노력 결과 한 번의 휴학도 없이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한 뒤 김포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도 쉽게 됐다. 그 곳에서 4년 동안 일하다가 결혼 직후엔 2020년에 신혼집과 출퇴근 등을 감안해 양지병원으로 옮겼다. 김포에서 처음 들어간 것이 수술실 간호사였는데, 지금도 수술실에서 일한다.
“수술실은 남자 간호사가 많아서 편해요. 그리고 말투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좋고요. 다른 간호사들은 환자들과 많이 해야 하지만, 수술 환자들은 마취를 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요.”
2019년 그는 9살 연하의 탈북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부인의 직업도 간호사다. 각자 병원도 다르고, 통근거리도 멀며, 교대 시간도 어긋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지난해엔 신축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간호사를 택한 것은 잘한 결정 같아요. 너무 만족합니다.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 어랑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늘은 뭘 훔쳐올까’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통일되면 뭘 할지 이런 거창한 고민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어쨌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지난해 강 씨는 통일부가 주최하고 남북하나재단이 후원한 ‘제9회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북한군 위생병으로 9년, 한국에선 종합병원 간호사로 7년을 산 그는 시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7년차 간호사로 모든 수술실의 방장을 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를 끌어안고 함께 가려 했던 팀장님들과 수술실 동료들의 관심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지만, 그걸 통해 간절함과 절실함은 어떤 벽도 가로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통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체제가 다른 삶을 살다가 와서 이 땅에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작지만 큰 의미가 있는 진정한 통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