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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로싱’의 실제 인물 유상준 씨의 삶[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3-02-05 09:00:00


2004년 자신이 중국에서 구출한 14세 탈북 소녀와 서울에서 반갑게 재회한 유상준 씨.

유상준 씨는 생일이 가장 슬픈 날이다. 7월 6일. 그날 마지막 혈육이던 어린 아들이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다 2001년 몽골 사막에서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어머니와 아내, 작은 아들은 1997년 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었다.

유 씨는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다. 유 씨는 그 자신이 또한 군 복무 중에 방사능으로 피폭돼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북한 체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홀로 찾아온 따뜻한 남쪽 땅에서 그는 여름에도 서늘한 추위를 느끼며 살고 있다.
# 조치원 의형제들
유 씨는 1963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충남 조치원 사람이다. 해방전 고향에서 결혼한 부부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자리를 찾아 청진에 와 김책제철소에서 일했다.

해방이 돼 집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38선이 생겼다는 말에 주저앉았다. 이듬해 첫 아들이 태어났다. 1950년 전쟁 시기 국군이 청진까지 올라갔을 때는 부친이 아픈 데다 둘째 아들이 4월에 태어나는 바람에 또 떠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침에 국군이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해서 밥을 하고 그걸 메고 부령(청진 위의 도시)까지 따라 갔는데, 오후에 다시 가야 한다면서 돌아가더라”고 했다. 실제 전쟁 때 국군은 청진에 들어가자마자 하루도 안돼 후퇴했다.

청진에 눌러앉아 살게 된 부부는 남쪽 출신이란 이유로 노동 계급에서 농민 계급으로 강등돼 청진에 채소를 공급하는 농장에서 일하게 됐다. 자식도 계속 낳았는데, 유 씨는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보니 맏형과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됐는데,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또 태어났다.

유 씨가 크면서 보니 고향인 근동에 조치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조치원 사람들은 북한 체제 아래서도 의형제를 맺고 교류하며 지냈다.

추석날에는 딴 곳에 이사 갔던 사람들도 근동으로 왔다. 근동엔 조치원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 씨가 탈북하기 전까지도 산소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 난다.

유 씨의 어린 시절은 남들과 별 다를 것이 없이 평범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1979년 북한군에 입대했는데 해군에 가게 됐다.
#방사선 피폭
그의 군 복무는 남들과는 좀 달랐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원산 해군사령부 소속으로 군수선박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대다수가 군관이고, 일반병은 6명에 불과했다.

부대의 임무는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군함이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지는지를 감독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군검제도’라고 하는데, 하도 민간에서 대충 만들어 군에 인계하자 김일성이 군 장비는 군이 직접 검사한 뒤 인계하라고 지시해 유 씨가 복무한 부대가 생겨났다.

조선소에서 군함이 건조되면 유 씨 등 일반 병사들은 현장에 나가 감마선 단층 촬영을 보조했다. 배의 블록이 제대로 연결됐는지 보기 위해선 둥근 납덩이 안에 뚫은 연필심 굵기의 구멍에 세슘이라는 방사선 물질을 넣고 이를 검사할 위치에 붙인 필름에 쏘는데, 이를 통해 불량을 알 수 있었다. 세슘은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할 때 나오는 초강력 방사능 물질이다.

1984년 작업 중 세슘 유출 사건이 터졌다. 작업하던 군관은 몇 달 만에 얼굴이 까맣게 변해 제대했다. 옆에 있던 유씨는 동해함대사령부 병원인 ‘31호병원’에 실려 갔다. 방사선 피폭을 당했지만 뾰족히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한 군의관이 소련에서 배운 방법이라면서 기뢰를 만들 때 들어가는 은을 구해와 미세한 조각을 만든 뒤 유 씨의 온 몸에 심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유 씨는 목숨은 건졌다. 지금도 유 씨 몸에는 까만 작은 점들이 잔뜩 박혀있는데, 그때 이식한 은이 변색한 것이다.

7~8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는데, 제대 시켜주지 않고 다시 부대로 보냈다. 이 곳에서 유씨는 1989년까지 10년 6개월 동안 근무했다. 당시는 남쪽 연고자라고 해도 군 복무를 10년 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줬다. 그러나 농민의 자녀는 농민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성분이라는 굴레는 넘을 수가 없었다.

제대한 유 씨는 고향인 근동으로 돌아와 농장원으로 일하게 됐다. 제대 후 몇 달 만에 군 복무 중에 알게 됐던 여성과 결혼해 1990년 맏아들 철민이가 태어났다. 농장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피폭 후유증 때문인지 몸은 시름시름 계속 아팠다.

차인표 씨가 열연한 영화 크로싱 포스터.

# 고기 먹는 옆집
유 씨는 고향에서 몇 년 동안 농민으로 일하다가 고난의 행군을 맞게 됐다. 고난의 행군은 실질적으로 1994년부터 시작됐는데, 이때 직접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도 많이 굶어죽었다.

유 씨 가족은 1997년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 해가 특히 어려웠다. 유 씨의 어머니, 아내, 작은 아들도 먹지 못해 굶어서 사망했다.

유 씨가 일하던 근동 농장에는 농민이 600여명이 소속돼 있었는데 1997년에 이중 6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 중 공식적으로 굶어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농장에서는 아파서 앓다가 죽었다고 보고했다.

고지식한 유 씨는 “노동당원이 남들처럼 밭에서 작물을 훔쳐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가족을 다 잃고, 하나 남은 철민이까지 굶겨 죽일 지경에 몰렸다. 풀중독으로 쓰러진 맏아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났다.

그는 도끼를 메고 산에 올랐다. 새벽부터 깊은 산골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보기 좋게 팬 뒤 수남장마당으로 메고 날랐다. 30㎏짜리 나무짐을 메고 30리가 넘는 장마당에 갔다 오면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게 일하니 굶어죽지 않을 수가 있었다.

유 씨는 이 때부터 달라졌다.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하니 죽음 밖에 없었지만,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니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 노동당원임을 의식해 농장에서 여는 회의에 100% 출석했지만, 그 때부터 나가지 않았다. 당시 근동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유 씨가 살던 집은 긴 주택에 칸막이를 하고 여러 세대가 거주하는 일명 ‘하모니카주택’이었다. 옆집에는 철도안전원이 살았다. 철도안전원은 북에서 잘 사는 직업에 속한다.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단속해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대로 된 여행증명서를 갖고 장사하려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속하면 돈이 들어왔다.

덕분에 안전원 가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굶어죽는 와중에 고기 냄새를 풍길 수는 없어 주변 눈치를 보면서 뼈도 멀리 내다 묻어야 했다. 옆집에선 사람이 굶어 죽어 가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집은 고기를 먹고 산 것이다. 물론 안전원도 “다 굶어죽는데 누굴 도와주고 누굴 도와주지 말아야 하냐. 우리도 몰래 숨어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할 말은 있을 것이다.
# 탈북
어느 날,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왔다. 같은 하모니카주택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푸념을 했다.

“왜정 때도 이리 살지 않았는데, 이게 뭐요. 젊은 양반이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중국이나 가보게나. 내 조카도 중국에 갔는데, 들어보니 젊은 애들은 요새 다 거기에 간대. 중국에 가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대.”

유 씨는 그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기서 더 버텨봐야 철민이를 굶겨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더 이상 팔 재산도 없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다.

1998년 4월 그는 국경경비대의 눈을 피해 중국 화룡현 대동마을이란 곳으로 넘어갔다. 강을 건너 걸어가는데, 일하던 한 농부가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조선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일을 그만두고 부자를 달구지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농부는 모친을 찾아 밥을 차려달라고 했는데, 쌀밥에 생선이 반찬으로 나왔다.

유 씨는 “오늘이 누구 생일인가”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 농부는 한족이었는데, 모친이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다. 밥을 먹고 나자 그는 “당신은 여기 오래 있지 못하니 깊이 들어가야 살 수 있다”며 임산노동자들의 차를 불러 태워주었다. 갈 때는 아이의 옷과 도중식사까지 싸주었다.

유 씨는 아직도 아무 사심도 없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북중 국경의 그 농부를 잊지 못한다. 사실 대량 탈북 초기에만 해도 연변에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 왔다”며 동정하고 아낌없이 도와준 한족과 조선족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 못지 않게 탈북자를 이용해먹는 나쁜 인간들도 많았다. 유 씨는 중국에 좀 더 체류하면서 그걸 알게 됐다.

부자를 태운 차는 “여기부턴 더 같이 가지 못한다”며 어느 초막에서 그들을 내려주었다. 그 초막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도 이들 부자를 며칠 동안 먹여주고 약도 갖다 주며 돌봐주었다. 나중엔 화룡 어느 농촌에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중국에서 유 씨가 거주하던 허름한 흙집. 그 앞에서 유 씨의 아들 유철민(빨간 모자)이 다른 아동과 함께 탈북 고아들을 지원하던 한국인 선교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상갓집 개
유 씨가 간 집은 주인 남자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온 집이었다. 그는 중국에선 아무리 애를 써도 1년에 6천 위안을 벌지 못하는데, 한국에 가면 매달 1만 위안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소도 20마리를 샀는데 키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유 씨는 그의 소를 대신 키워주기로 했다.

그는 나름 제 딴에는 깊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지나서 보니 그 마을에는 온통 탈북민들이었다. 밤에 마을로 들어오는 차량 불빛이 보이면 공안 단속이 오는 줄 알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 나와 산으로 올랐다. 산에 올라가 보니 수십 명의 탈북민이 모였다.

산에서 모인 이들은 어디에 가면 잘 숨어있을 수 있는지 정보도 교환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도 촌장집에서 일하던 부부가 얼마 전 잡혀 갔는데, 돈 주기 싫어 밀고한 것이라거나, 어느 집에서 일하던 부부는 남자가 북송되다 탈출해 발이 부러진 채 돌아와 보니 그새 아내를 팔았다거나 등등 흉흉한 소문들이 많았다.

한 달쯤 지내는 사이 유 씨도 위기를 넘겼다. 하루는 공안이 들어와 신고가 들어왔다며 모든 집을 수색했는데, 유 씨가 있는 집만 들어오지 않았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 공안이 설마 이곳에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지나친 것이다.

유 씨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집에서 몇 달 동안 새 집을 지어주며 얻어먹기도 하고 또 어디 가선 나무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을 전전해서는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농촌에서 탈북민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는 공짜 노동력이었다. 또 잡혀가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버티며 살다보니 한국 선교사도 만났다. 선교사는 아이는 자기가 맡아 공부도 시켜줄 테니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 자리 잡으라고 설득했다. 유 씨는 선교사 말대로 아이를 맡기고 1999년 연길로 옮겨갔다. 대도시는 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곳에서 그는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은 몇 달 동안 돈을 주지 않았다. 하루는 용기를 내 돈을 달라고 하자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끌고 와 그를 마구 팼다. “조선놈이 신고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 돈까지 받을 생각을 한다”는 이유였다. 그때 갈비뼈가 금이 갔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탈북민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했던 사람은 화룡 용소촌이라는 곳의 담배농장에 탈북민 30여명을 데리고 일 시키던 김명주라는 자였다. 그는 돈을 달라는 탈북민을 마구 구타하고, 신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게 학대를 해도 먹여만 달라며 북한에서 탈북민이 끊임없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도시에 나가니 성과도 있었다. 탈북민 사역을 하려고 온 미국과 한국 선교사들이 도시에 많아 이들을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에서 두리하나 천기원 선교사를 만나 한국행을 제안 받았다.
#한국에 도착하다
2000년 12월 1일 그는 다른 탈북민 20명과 함께 몽골 국경으로 향했다.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막에서 몽골 군인들에게 체포됐는데, 이들은 탈북민을 다시 중국에 넘기려 했다. 남성들이 나서서 안가겠다며 몽골 군인들과 싸우니 기진맥진해진 이들은 탈북민들을 싣고 어느 군부대 목욕탕에 수감시켰다.

나중에 보니 여인과 아이들, 노인들만 사라졌다. 저항하지 못하는 힘 없는 사람들만 골라 끝내 중국에 다시 보낸 것이다. 중국으로 돌려 보낸 이들은 얼마 안 돼 모두 한국으로 다 왔다. 알고 보니 노약자들만 받은 중국 군인들은 귀찮다고 이들을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풀어준 것이다.

유 씨는 몽골을 거쳐 2000년 12월 15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 온 탈북민이 1000명 좀 넘을 때였다. 유 씨는 매우 빨리 온 경우에 해당한다. 이듬해 5월 그는 포항 북구에 정착했다. 어느 공장에 취직도 했는데 얼마쯤 일한 뒤 공장에 불이나 월급도 못받고 그만둬야 했다.

한국에 온 유 씨의 마음에는 온통 아들을 데려올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돈을 마련해 아들을 찾아 자신이 왔던 선을 이용해 데리려 오려 했다. 그런데 오던 중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 일행이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맸는데, 끝내 어린 철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는 방황했고, 다시 일어났다. 2017년 1월 기자는 유상준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내용이 아들을 잃은 이후 유 씨의 16년 동안 한국 정착 스토리다. 당시 썼던 ‘서울과 평양사이’ 칼럼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유 씨의 아들 유철민 군이 몽골 사막에서 숨지기 3개월 전에 자신을 돌보던 선교사와 함께 찍은 사진. 당시 그는 11세였다.

# ‘바보’ 탈북자 유상준(2017년 1월 26자 동아일보 칼럼)
탈북민 유상준(54)의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인다. 말주변도 없다. 느릿느릿 말하다 “저처럼 북에서 농사나 짓던 놈이 뭘 알겠습니까”라며 자주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면 그는 아주 빨랐던 사람이다. 남한으로 오는 게 아주 어려웠던 2000년 12월 남한으로 왔다. 한국 입국 탈북민 3만여 명 중 선착순 1000명 안에 들어간다.

남한에서 상상했던 그의 꿈은 2001년 7월 부서졌다. 아버지를 찾아 탈북했던 하나밖에 없는 12세 아들 철민이가 몽골 국경을 넘다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 유상준이다. 아들을 잃고 1년 넘게 우울증, 자살 충동과 싸우던 그는 2003년 훌쩍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모르는 탈북민이 너무 많았고, 한국엔 혈육을 데려오지 못한 탈북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먼저 온 내가 이들을 데려와야겠다 생각했죠.”

2004년 그가 첫 번째로 구출한 사람은 철민이 또래인 14세 탈북 소녀였다. 그 소녀는 지금 성균관대를 졸업한 27세 여성으로 성장했다.

이듬해엔 직접 새 탈북 루트를 개척했다. 당시만 해도 탈북 브로커들은 한국으로 보내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씩 받았다. 유상준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7만∼8만 원씩 일당을 받으며 몇 달 일해 돈을 벌어선 중국으로 건너가 탈북민을 구출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에 와서 막노동을 했다. 구출한 사람 중 몇 명이 고맙다고 자발적으로 돈 봉투를 건넬 때도 있었지만 100만 원을 주면 50만 원은 다시 돌려줬다. 그 이상은 받아본 일이 없다.

유상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까지 온 탈북민은 500명이 넘는다. 이 중 90여 명은 그가 직접 인솔해 몽골 국경을 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5개월 동안 수감 생활도 했다. 내몽골 감옥에서 여름 옷을 입고 영하 40도를 견디느라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골병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1년 넘게 병치레를 하면서도 세탁소 운영과 아파트 경비 일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들고 2009년 중국에 건너갔다. 다시 탈북민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북전단(삐라) 풍선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면 북한 깊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유상준은 중국에서 풍선 가스 구매처를 찾아다녔고, 인쇄물을 찍었다. 그러다 2011년 5월 중국 국가안전국에 잡혔다. 그를 신고한 것은 다름 아닌 탈북 여성이었다.

“눈을 가리고 팬티만 입은 채 24시간 동안 내내 맞았습니다. 2명씩 교대로 들어와 때렸는데 너무 맞아서 지금도 기억력이 성치 못합니다.”

그는 다행히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몇 년 뒤 자신을 신고했던 여성이 서울에서 탈북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사로 일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복수를 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에 갈 수 없게 된 유상준은 한국에 와서도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원통하게 숨진 아들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곳을 몇 개월 따라다녔지만, 핵심 ‘영업 비밀’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 루트를 혼자 개척했던 10년 전처럼 그는 이번에도 혼자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풍선 타이머를 연구했고, 퇴근해서도 연구에 매달렸다. 동네 재활용장에 사정을 해서 선풍기 타이머들을 모두 뜯어오기도 했다. 0.01mm 니크롬선(발열체의 일종)을 꿰느라 목 디스크가 걸렸다. 잠을 못 자며 4개월 꼬박 고생해 수천m 상공 영하의 온도에서도 작동하는 타이머를 만들어냈다.

유상준은 요즘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월급은 150만 원 남짓. 주거비와 교통비, 통신비, 쌀값 등을 다 합쳐 자기를 위해 쓰는 돈은 30만 원도 안 된다. 그는 임대 및 관리비가 13만 원인 임대주택에 홀로 살면서 돈이 아까워 난방도 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탈북 고아 2명을 후원했고, 지금도 탈북자 구출 후원금을 보낸다.

아들 둘을 군에서 잃고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를 위해선 TV와 전화기를 사주고, 눈 수술비까지 보탰다. 몇 달 월급이 모이면 남의 차를 빌려 대북전단을 조용히 북에 날린다. 그러곤 또 돈을 모은다. 필요한 사람에겐 자기가 연구한 노하우를 전부 가르쳐준다.

유상준의 한국 생활 16년은 이렇게 흘렀다. 그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그는 자랑할 줄 모른다. 위에 쓴 유상준의 일대기는 그의 지인들에게 듣고 본인에게 확인한 것이다. 하나를 하고 열을 했다고 자랑하기 급급한 이 세상에서, 이런 ‘바보’가 탈북자 중에 소문 없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유상준 씨의 최근 모습. 그는 사진을 찍지 않아 갖고 있는 사진이 없다. 기사에서 꼭 써야 한다고 하니 스스로 셀카를 찍어 보내왔다.

# 이후 이야기
위의 칼럼이 나가고 다시 6년이 흘렀다. 유 씨는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6년 만에 다시 만난 유 씨는 그 때보다 더 수척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이제는 난방도 틀고 살아 한달 생활비가 3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랐다. 과거엔 없어도 탈북 고아 6~7명에게 후원금부터 보내고 살았지만, 이제는 쓰고 남은 돈을 후원한다고 했다.

그는 올해 은퇴할 연령이 됐는데 모아둔 돈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전혀 걱정은 없다고 했다.

“노인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합치면 은퇴해도 매달 60만 씩은 나올 것 같은데, 지금 50만 원으로 충분히 사는데 그거면 충분하죠. 은퇴 이후에도 걱정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적은 돈으로 살수 있는 이유는 그의 눈높이가 여전히 북한에서 살던 시절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북한에서 살 때 물을 길으러 500m씩 걸어갔는데 지금은 수도만 틀면 물이 나오니 얼마나 좋습니까.”

유 씨는 지금까지 국내외 어느 휴양지에도 놀러 가본 적이 없다. 회사에서 2년에 한번씩 리조트 사용권이 나오지만 그것도 사용해 본 일이 없다. 놀러갈 일이 없으니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인터뷰 후에 과거 사진들을 요청하자 하나도 없다고 난감해 하더니 스스로 셀카를 찍어 보내왔다.

그는 죽을 때 남은 재산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몸도 재산에 속했다. 그는 지갑에 늘 ‘장기기증서약서’를 갖고 다닌다. 어디에서 혹시 사고가 나도 남은 자신의 신체조차 사회에 돌려주고 가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나빠지는 건강은 여전히 고민이다. 그래서 요즘은 쉬는 날이면 무조건 산에 오른다. 나무도 보고, 새가 우는 지저귐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렸던 대북 전단 살포는 2000년 8월 ‘대북전단금지법’이 통과된 이후 “아무리 악법이라도 법은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사실상 손을 뗐다.

그럼에도 유 씨의 유일한 희망은 하루 빨리 통일이 되는 것이다.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부모 자식 다 잃고 혼자 독하게 살아온 놈의 죄를 속죄하고, 그때 가진 재산이 있다면 고향 사람들에게 다 나눠줄 겁니다. 지금 제가 가진 것들은 제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하며 살고 있죠.”

유 씨의 마음에는 늘 잊지 못할 두 명의 은인이 자리 잡고 있다.

“한 명은 두만강을 넘자마자 만났던 중국 한족 농부입니다. 몇 년 뒤에 찾아갔더니 없더군요. 은혜는 못 갚았지만 저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북한에서 살 때 만났던 20대 아가씨입니다. 하루는 아들이 풀 중독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약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축 처진 아들을 업고 나오는데, 어떤 처녀가 나를 부르더니 손에 5원을 쥐어주더군요. 당시 페니실린 한 병이 5원이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고마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조용히 탈북 고아들을 후원하는 것도 어쩌면 그 처녀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