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과 인제서 만난 겨울나무숲 살아천년 죽어천년 주목나무숲 국내최대 독일 가문비나무숲 닥터 지바고 영화 같은 자작나무숲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발왕산(1458m) 모나파크 정상은 케이블카를 타면 15분이면 도착한다. 이곳에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잘 보전된 주목들을 감상할 수 있는 천년주목숲길(3.2km)이 조성돼 있다. 유럽식 산장 모양의 드래곤캐슬 아래쪽에 ‘갈지자(之)’ 모양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이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고산지대의 능선에는 커다란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입구.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가 핀 발왕산의 겨울나무.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에 있는 ‘고해 주목’. 텅 빈 몸통 안에 나 홀로 들어가 나무에 폭 감싸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둘레 4.5m에 이르는 몸통 안 빈 공간에서 마가목이 자라고 있는 ‘어머니왕주목’.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은 발왕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 순백의 눈이 스며든 맑은 석간수가 매일 410t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천연미네랄을 함유한 발왕수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정기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숲이다. 이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 가문비나무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 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숲속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 자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하얀 눈이 쌓인 강원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쯤 걸으니 자작나무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세계. 하얀 눈밭에 서 있는 키 큰 자작나무 군락의 첫인상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랄까.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 모양, 호미 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숲에 있는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작나무숲에서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의 껍데기를 손으로 만져 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 벌 겹쳐 입기가 좋다는 걸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인제 자작나무숲에는 방문객들이 자작나무 껍데기에 낙서를 하거나, 껍데기를 벗겨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는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구석에 불쏘시개용으로 비치돼 있던 나무다.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데기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풍경을 담은 시 ‘백화(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면 알 수 있다.
글·사진 평창·인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