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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버텨낸 눈꽃 따라 사박사박… 추억이 안단테로 흐른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3-02-04 03:00:00

평창과 인제서 만난 겨울나무숲
살아천년 죽어천년 주목나무숲
국내최대 독일 가문비나무숲
닥터 지바고 영화 같은 자작나무숲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발왕산(1458m) 모나파크 정상은 케이블카를 타면 15분이면 도착한다. 이곳에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잘 보전된 주목들을 감상할 수 있는 천년주목숲길(3.2km)이 조성돼 있다. 유럽식 산장 모양의 드래곤캐슬 아래쪽에 ‘갈지자(之)’ 모양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이다.

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 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나뭇가지에 서리가 잔뜩 붙어 눈꽃을 이룬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얼음꽃은 크리스털 보석처럼 햇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강원도의 높은 산에서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과 하얀 눈처럼 시린 은(銀)세계를 펼쳐내는 자작나무까지. 겨울산을 지키는 나무에게서 절대 고독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았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고산지대의 능선에는 커다란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입구.

주목은 왜 그렇게 높고 추운 산에서 더 잘 살아가는 것일까. 주목은 1년에 불과 몇 cm밖에 자라지 않아 성장이 느린 나무로 유명하다. 쑥쑥 자라는 나무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늘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을 운명이기에, 주목의 선택은 과감하게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따뜻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혹독한 환경에서 자발적 고립과 무한한 인내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주목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강추위와 칼바람을 견뎌내며 천년을 살아간다.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가 핀 발왕산의 겨울나무.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엔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50주년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rk)가 지난해 조성한 숲길이다. 이곳에서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한 모나파크는 수년간 산림청, 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생태를 살린 무장애 덱길(3.2km)을 만들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정상의 드래곤캐슬에 도착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와 눈꽃, 얼음꽃 요정이 살고 있는 상 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천년주목숲길이 나타난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에 있는 ‘고해 주목’. 텅 빈 몸통 안에 나 홀로 들어가 나무에 폭 감싸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서 그럴까. 천년을 넘게 산 주목들은 속이 텅 비었다. 참선의 나무, 고뇌의 주목, 왕발나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워온 나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담긴 이름이 붙어 있다. ‘고해(告解)의 주목’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둘레 4.5m에 이르는 몸통 안 빈 공간에서 마가목이 자라고 있는 ‘어머니왕주목’.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고 조성했다는 천년주목숲길은 걷다 보면 덱길 위로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누구나 자연 앞에 몸을 낮춰야 하는 ‘겸손의 나무’다. 오래된 주목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생명이 싹트는 경우도 많다. 성인 세 명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왕주목’의 몸통 한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출산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어머니왕주목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인근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은 발왕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 순백의 눈이 스며든 맑은 석간수가 매일 410t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천연미네랄을 함유한 발왕수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정기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숲이다. 이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 가문비나무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 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숲속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 자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하얀 눈이 쌓인 강원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에 온 듯한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닥터 지바고’ 영화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숲이다.

자작나무는 북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함경도, 일본 홋카이도 등 추운 지방에서 자생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4∼1995년 41만 평에 69만 그루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쯤 걸으니 자작나무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세계. 하얀 눈밭에 서 있는 키 큰 자작나무 군락의 첫인상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랄까.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 모양, 호미 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숲에 있는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작나무숲에서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의 껍데기를 손으로 만져 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 벌 겹쳐 입기가 좋다는 걸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인제 자작나무숲에는 방문객들이 자작나무 껍데기에 낙서를 하거나, 껍데기를 벗겨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는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구석에 불쏘시개용으로 비치돼 있던 나무다.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데기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풍경을 담은 시 ‘백화(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면 알 수 있다.


글·사진 평창·인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