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발왕산 상고대핀 나무
발왕산 정상 상고대가 핀 나무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발왕산 케이블카가 도착하는 드래곤캐슬 밑 지그재그 모양 데크길이 천년주목숲길이다. 발왕산모나파크 제공
고산지대의 능선에는 다른 큰 나무를 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일자주목’
강원 용평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엔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50주년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가)가 지난해 만든 숲길이다. 발왕산 정상부에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한 모나파크는 수년간 산림청, 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생태를 살린 무장애 데크길(3.2km)을 조성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정상에 있는 드래곤캐슬에 도착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오면 발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눈꽃, 얼음꽃 요정이 살고 있는 상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천년주목숲길이 나타난다.
가지가 숫자 8처럼 꼬여있는 ‘8자 주목’.
‘고해의 주목’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고해와 명상 끝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빛!
고해 주목
고개를 숙여 몸을 낮추고 지나가야하는 겸손의 나무.
오래된 주목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생명이 싹트는 경우도 많다. 성인 세 명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왕주목’의 몸통 한 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출산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어머니왕주목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어머니왕주목
인근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보인다.
아버지왕주목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발왕산모나파크 제공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 숲이다. 애니포레는 울릉도에서 산나물이나 고로쇠물을 채취할 때 쓰는 작고 느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이 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가문비나무 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날이 풀리면 독일가문비나무 숲 속에서는 요가 클래스도 열린다. 이 곳에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푸들이나 비숑같은 반려견처럼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자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에 온 듯한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닥터 지바고’ 영화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음악이 들릴 듯하다. 연인인 라라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썰매를 타고 떠나가던 모습을 바라보던 지바고의 눈빛도 떠오른다. 북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함경도, 일본 홋카이도 등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뽀얀 수피가 아름다운 수종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4~95년까지 41만 평에 69만 그루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 쯤 걸으니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銀)세계. 하얀 눈밭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의 첫 느낌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다.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모양, 호미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 숲에 있는 수백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히 속삭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새하얀 나무 껍질 하나로 버틴다. 자작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하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보온을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벌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는 법을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얇은 껍질 사이에 풍부한 기름성분까지 넣어 나무의 근원인 부름켜(형성층)가 얼지 않도록 한다.
자작나무란 이름은 작위를 받은 귀족같은 풍모에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탈 때 ‘자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 구석에 불쏘시개로 놓여 있던 나무였다. 결혼식 등 경사스러운 날에 불을 켜는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1912~1995)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풍경을 담은 시 ‘백화(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는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자작나무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