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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허슬도 연습하는 김진유 [유재영 기자의 보너스 원샷]

입력 | 2023-02-06 17:41:00


공격 리바운드 상황에서 무서운 공 집착력을 보여주는 김진유(가운데). KBL(한국농구연맹) 제공



강백호.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었던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의 한국판 이름이다. 최근 영화로 개봉된 ‘슬램덩크’는 농구 ‘덕후’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데 역시 강백호의 존재감이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만화 속 강백호는 애초 농구와 거리가 먼 캐릭터다. 농구를 좋아하는 한 여학생에 반해 고등학교 농구부에 들어갈 때만 해도 보여주는 농구 지능(Basketball IQ·BQ)은 제로에 가까웠다. 좌충우돌 사고만 치다가 타고난 운동 능력과 허슬 플레이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결국 농구에 눈을 뜨는 판타지 인물이다.

만화 속 강백호하면 떠오르는 국내 프로농구 선수가 캐롯의 김진유(29)다. 인정사정 없는 몸싸움과 허슬 플레이를 즐기는, 보기드문 파이터형 가드다. ‘풋내기’ 시절의 강백호가 바로 연상된다. 키(188cm)도 같다.

지난 시즌까지 주전 선수들이 휴식을 가질 때 대신 들어가 경기당 평균 5~10분 남짓을 뛰는 ‘식스맨’이었던 김진유는 변변하게 내세울 만한 기록이 없다. 명색이 프로농구 선수인데 전문가나 지도자들로부터 ‘BQ와는 거리가 있는 선수’라는 혹독한 평가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튼튼하게 몸을 물려주신 덕분에 농구를 포기하지 않고 해왔다”며 기술이 좋은 선수들이 다소 소홀하게 여기는 기능 영역을 가다듬고 잠재력을 터트릴 기회를 기다려왔다.

그런 그에게 프로농구 2022~2023시즌 인생 반전이 일어났다.

6일 현재까지 27경기에서 경기당 19분 45초 동안 코트에 나선 것부터가 기막히다. 주전급의 가용 시간이다. 이렇게 뛰어본 건 건국대 시절 이후 처음이다. 고질적으로 허리가 안 좋고 무릎도 아프지만 ‘물 만난 고기’처럼 쉬지 않고 몸을 상대에게, 코트 바닥에 내 던지는 중이다. 동료들의 슛이 성공되지 않을 때는 적극적으로 골밑에 뛰어들어 공격 리바운드에 가담하고 있다. 공 경합 상황이나 상대 주득점원 수비에서도 집념의 허슬을 발휘하고 있다.
●  문성곤의  허슬 아바타
김진유는 이번 시즌 경기당 3.0점, 4.4 리바운드, 1.4어시스트 등을 기록하고 있다. 돋보이는 기록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KGC 문성곤(30·195cm)과 비교하며 가치를 찾는다. 문성곤은 KBL(한국농구연맹) 최초 3시즌 연속 최우수 수비상을 받은 프로농구 ‘허슬’ 포워드의 대명사다. 코트 어디서든 공격 리바운드 가담에 찰거머리 수비까지 발군이라 ‘문길동’으로 불린다. 다음 시즌 자유계약선수(FA)가 되는데 대다수 팀들이 탐을 내고 있다.

김진유는 가드 포지션에서 상대 에이스를 전담해 수비하면서도 리바운드를 4.4개나 잡아냈다. 문성곤(5.0개)과 비슷하다. 오히려 공격 리바운드는 경기당 1.8개로 문성곤(1.7)보다 많다. 김진유의 움직임으로 팀은 2차 공격 횟수를 늘리고 상대 역습을 적절하게 지연시킬 수 있었다.

GD(굿 수비) 수치도 0.4개(전체 2위)로 문성곤(0.3개)을 앞선다. 지난 시즌까지 문성곤을 키우고 캐롯에 부임한 김승기 감독 체제에서 김진유는 ‘문성곤 아바타’처럼 작동해주고 있다. 김진유는 “그런 부분까지 의식하지 않지만 출전 시간을 길게 배려해주시는 감독님에게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죽어라고 뛰다보니 기록이 따라오는 것 같다”고 했다.

국내 최고의 3점 슈터 ‘에이스’ 전성현의 위력도 ‘김진유 매칭’ 으로 전보다 배가됐다. 지난 시즌 54경기에서 177개의 3점 슛을 성공시켰는데, 이번 시즌엔 39경기에서 이미 150개의 3점 슛을 꽂았다. 프로농구 사상 최초 한 시즌 3점 슛 200개 돌파를 노리고 있다.

전성현을 막는 상대 전담 수비들과 1차적으로 부딪혀 압박의 강도를 상쇄시켜주는 김진유의 전투적인 도움이 크게 한 몫했다. 전성현은 지난 시즌 KGC에서도 문성곤의 지원 사격을 제대로 받았다.

전성현에게 수비가 집중되는 상황에서 김진유의 깜짝 공격을 노리는 사용법 역시 상대에게 적잖은 부담을 줬다. 김진유는 전성현과 뛸 때 3점 슛 라인 밖과 골밑 슛 성공률 모두 평균 이상이다.

전성현은 상무에서도 같이 한솥밥을 먹은 절친 선배라 시너지 효과를 더 기대한다. 김진유는 “형이 슛을 던지면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느낌이 온다. 경기를 뛸 때 많은 조언을 해준다. 슛을 쏠 때 머뭇거리는 단점을 고쳐준 것도 성현 형”이라고 말했다.

김진유의 탁월한 팀 기여도는 공수 효율 관련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진유의 ‘Offensive Rating(OFFRTG)’은 166.4다. 이번 시즌 2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 중 2위다. 각 팀 주 득점원인 KCC 라건아(147.0), 현대모비스 함지훈(145.5), LG 아셈 마레이(140.8) 등을 앞선다.

‘Offensive Rating’은 100번 공격 기회에서의 득점 기대치다. 김진유가 뛸 때 약 166득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팀의 주득점원들은 공격 횟수, 평균 득점 수치가 높지만 범실 숫자도 많기 때문에 대체로 득점 기대 수치가 확연하게 높지는 않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공격 효율이다. 김진유의 ‘Defensive Rating’(100번의 수비 기회에서 실점 예상치)은 110.1. 공격과 수비 기여도의 균형 정도를 알 수 있는 마진(Net Rating, 득점 기대치-실점 예상치)이 +56.3으로 역시 리그 2위다.
● 연습 때도 허슬 반복…방치된 BQ를 깨우다
“진유가 연습 때 공격 패턴과 수비 로테이션을 자주 잊어버려 따로 반복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럴 때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한다. 진지한 상황에서도 너무 진정성 있게 표현을 해서 다들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시즌까지 김진유를 지도한 김병철 전 오리온(캐롯의 전신) 코치는 연습에 임하는 멘탈과 태도에서 김진유가 기회를 받게 된 이유를 찾았다. 지금도 팀 내에서 김진유가 연습에 뜨면 동료 선수들이 접근을 피할만큼 모든 연습 과정에서 몸을 던진다. 경기 전날 공수 패턴의 흐름, 길만 맞추는 연습에서도 동료들의 실수를 유발하고 거칠게 몸싸움을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연습에서 110~120%의 힘을 써봐야 실전에서 100% 전력을 다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습은 실전의 연속’. 김진유는 스스로 형식적인 연습을 각성한 계기가 있다고 했다. 2017년 오리온 선수들은 비시즌 기간 타이론 엘리스 전 미국 농구 대표팀 코치를 초빙해 스킬트레이닝 훈련을 받았다. 엘리스 전 코치는 “최고의 선수가 되려면 최고의 배우가 돼야 한다”며 “선수들의 움직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강조했었다. 김진유는 “당시 어려서였는지 그 가르침의 중요성을 이해 못하고 연습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고 말했다.

김진유만의 허슬에 대한 집중력과 노하우가 실전에서 요긴하게 통할 수 있다는 점을 김 감독은 간파했다. 김 감독은 “무조건 공만 보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 아니더라. 출전 시간을 충분히 주니 슈퍼맨이 됐다. ‘이거 해줘’라고 주문하면 어떻게든 해결해준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앞으로도 김진유가 펼치고 싶은 인생 농구는 만화속 강백호 스타일이다. KBL 제공.   

● “과거도, 앞으로도 나는 강백호”
“감독님이 팀에 오시고 나서 ‘너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신 있게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전부 가려주셨어요.”

탄력을 받은 김에 허슬로 지난날 BQ의 아쉬움을 지우겠다는 그다. 김진유는 “대학 1, 2학년 때 머리카락을 다 밀고 다녔는데 어떤 팬이 ‘건국대 강백호’라 불러주셨다. 정말 강백호 ‘찐팬’이다. 강백호 농구를 좋아한다. 이 스타일로 계속 밀고 갈 생각”이라고 했다.

프로 데뷔 첫 더블-더블(KGC전, 12점-17리바운드) 기록을 세운 1월 21일은 나만의 ‘김진유 데이’로 삼고 기세가 꺾이고 슬럼프 조짐이 있을 때마다 자주 되새기기로 했다.

“그날 기록지는 가보로 남겨둘 겁니다. KGC를 이기고 감독님이 팬들에게 쇼맨십까지 하시는데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저는 처음 봤어요. 앞으로 여러 번 똑같이 웃게 해드려야죠.”

출전 시간 단 1초가 아쉬웠던 김진유의 절박한 허슬 농구가 화려하고 보기 좋은 개인기 재능에만 기대려는 프로 선수, 유망주들에게 잔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팀 농구에 최적화될만한 선수를 보는 기준과 그 발굴의 잣대를 바꿔놓고 있기도 하다. 김진유는 여전히 “동료들을 거들 뿐”이라며 몸을 던지고 있다.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