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식 세종병원 이사장
정부가 지난달 31일 ‘필수의료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과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 중단 등으로 드러난 필수 의료 분야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서 나온 대책인 만큼 의료계의 기대가 컸다.
이번 대책은 △지역 완결적 필수의료 제공 △충분한 의료 인력 확보 △필수의료 지원 공공정책수가 도입을 골자로 한다. 앞으로 지원 분야를 확대하고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는 등의 후속 대책이 뒤따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개별 내용들을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잘못된 내용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각각의 계획들을 시행하는 순서에 따라 성공하는 대책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하는 대책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예일대 보건학 교수였던 윌리엄 키시크는 그의 저서 ‘의료의 딜레마’에서 의료의 세 가지 가치인 접근성, 의료의 질 그리고 가격의 통제는 제한된 의료 자원을 두고 균형을 맞춰야 하는 삼각형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 가지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다른 가치를 잃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의료 정책이라는 무게 추들을 차례대로 잘 얹어서, 현재 문제를 야기하는 운동장의 균형을 먼저 잡아야 한다. 그래야 운동장 위에 추가적인 자원을 투입하더라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고루 분배된다. 이번 대책에 열거된 많은 대책 중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의료 인력의 수요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정책들이 먼저 시행되어야 한다. 이번 대책에 포함된 병원 간 순환당직제 도입이나 응급의료정보시스템 강화와 같이 기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방 의료 인력이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지역가산제와 지역 과목 간 인력 격차 최소화와 같은 정책이 먼저 시행되어야 한다. 중증, 응급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의사들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정책보다 지역 구분 없이 의료 인력의 수요를 높이는 정책을 먼저 시행하면 수도권의 상황을 조금 낫게 할 수는 있어도 지방의 상황은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가령 현재 전국에서 머리를 여는 수술(개두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의사의 숫자가 정해져 있는데, 병원별 진료 역량 강화를 위해 개두술 가능한 의사 수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면, 수도권 지역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지방 의료인들을 흡수해 지방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또 응급 환자의 집중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함께 시행해야 한다. 전국 대부분의 권역응급의료센터는 환자가 집중돼 과밀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과밀화는 응급의료의 질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원인이다. 대동맥 박리 환자는 흉통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의 0.1%도 안 되는데, 모든 흉통 환자를 대동맥 박리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이송한다면, 그 병원은 과밀화로 인해 대동맥 박리의 진단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중증응급의료센터를 추가로 지정하고 그 병원으로 초기 이송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보다 기존의 의료기관 간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가 구성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응급의료기관이나 지역응급의료센터에서 빨리 진단을 받도록 하고, 해당 병원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중증응급환자를 전원 프로토콜에 따라 빨리 이송하여 치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관 간 협력 네트워크 지원정책이 먼저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대책들이 우선순위에 맞게 실행되어야 후속 대책들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박진식 세종병원 이사장